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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찬 시인 / 모든 유추(類推) 가능한 문맥만이 좋은 시가 된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4.

모든 유추(類推) 가능한 문맥만이 좋은 시가 된다.

김영찬(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주간主幹)

 

 

일각수 유니콘(unicorn)은 일각의 뿔을 신봉할 수밖에 없다. 일각(一角)의 뿔이란 하나의 신앙, 하나의 표상이자 토템, 토탈상징(total symbol)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일생을 뿔 하나로 버티며 현현(顯現)하는 삶을 보라.

저 눈부시게 희디흰 말·말·말, 말의 이데아를!

전설 속의 일각수(一角獸) 유니콘은 신비스런 존재로 군림하기 위해 애초에 갖고 있었던 2개의 뿔 중 하나를 미련 없이 제거한 뒤 하나의 뿔로만 꿋꿋이 버텨오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처녀의 눈으로만 볼 수 있고’ ‘처녀의 손길로만 길들여질 수 있다’는 저 일각수 유니콘이 표상하는 불멸의 신성(神聖, deity)은 절대적인 숭고미(崇高美, sublime)에 이른다.

 

시인이라면 마땅히 하나의 뿔을 형상화할 수밖에 없는 일각의 뿔 대신 처음부터 뿔 자체를 의식하지도 않았던 여성민의 경우는 뿔 이상의 차원 높은 알레고리를 풀어낸다.

 

줄거리라고는 국수 줄거리뿐이라서 당신들은 나를 나무라겠지만

 

국수집 아저씨는 오늘도 국수를 뽑네.

 

나는 국수를 좋아해서 하루에도 두 번 국수를 먹으러 가고, 국수를 기다리며 누워 있는 일은 옥수수 같은 일, 샴푸 같은 일.

 

세상에 하나뿐인 국수집 마당에는 하나뿐인 조랑말과 하나뿐인 유리병나무.

 

눈을 뜨면 국수집 아저씨 국수를 먹고 있네. 나는 조랑말과 자고

 

조랑말은 조랑말이어서 기린처럼 잠을 자지는 않지. 기린은 삼 초 동안 잠을 자고 일 초 동안 기린의 기분을 유지하고

 

작은 유리병나무였다는 나무는 계속 자라 국수집 지붕을 덮는다.

 

유리병나무 안으로 어디선가 불빛이 찾아들면 밤이 온다. 환한 유리병나무 아래서 국수를 뽑네. 당신들은 나무라겠지만 슬프고 아름다워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네. 눈을 뜨면

 

나는 네 뼈를 사랑한단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흰 국수를 보면 알지 슬픈 얼굴로 국수집 아저씨 국수를 말고 있네. 미자 같은 일, 미자의 기분 같은 일.

 

국수를 좋아해서 나는 내 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국수를 먹고 조랑말은 조랑말이라서 아름다운 줄거리를 모르고

 

기린은 삼 초 동안 잠을 자고 일 초 동안 기분을 유지하네.

 

당신들은 나를 나무라네.

 

*여성민의 시, <미자의​ 기분 같은 일> 전문全文

 

아무리 뚱뚱하고 생뚱맞은 문맥들의 조합이라 하더라도 모든 유추(類推, analogy) 가능한 문맥만이 이미지로 연결돼 멋진 시를 만든다, 라고 나는 쓰고 여성민에게로 되돌아와 다시 그의 시를 촘촘히 읽는다. 일각수의 뿔이 내 등짝을 슬쩍 들이받는다.

 

그런데 무엇이 여성민으로 하여금 이토록 건방지고도 비합리적인, 말도 안 되는 발상을 가능케 하는가. 그의 시는 상호 유기적이지 않다. 일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비논리, 이상한 행위를 천연덕스럽게 진실인 양 가정한다. 이 비문(非文) 투성이의 무대응주의에 길들여지게 된 독자들은 의외로 차분하다. 그들은 시인의 무책임한 논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해체시에 서서히 길들여진 독자들은 이제 난해한 시의 행간에서 새로운 미학을 창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미학의 길에 입문하는 것이란, 익히 학습된 독자들 즉 유추 가능한 문장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특혜이다.

 

그러므로 여성민의 병꽃나무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은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읽기에 따라 그것은 신비로운 세상에서 느끼는 슬픔 이상의 진기한 고독이며 황홀경이 되기도 하고 행과 연을 진행하며 접혀지는 아기자기한 문장 흐름은 이색적으로 귀엽고도 소탈하다.

 

해체시의 독해방법이란 어쨌든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애매성과 모호성, 다의성을 끌어안은 창작적 책 읽기를 말한다. 즉 텍스트를 읽는 독자는 작가인 화자의 의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의미해석의 길로 나갈 수 있다. 이른 바 시를 읽는 독자는 활달한 유추의 폭을 마음껏 넓혀가며 해체와 창작을 동시에 수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간을 거슬러 도도하게 역류하는 여성민의 시에 나타난 부조리한 문장에 과민반응 대신 자신도 모르는 지적 쾌감을 얻는 아이러니를 즐기게 되는 것이다.

 

줄거리라고는 국수 줄거리뿐이라서 당신들은 나를 나무라겠지만

 

국수집 아저씨는 오늘도 국수를 뽑네

 

결론적으로 미자, 미자라는 막연한 기분에 기대어 삼 초 동안 잠을 자고 일 초 동안의 고독을 이해하려는 기린 곁에 서서 나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돌출하는 이미지가 느닷없이 재 돌출, 새로운 이미지와 충돌로 마딱들이다가 화합으로 길마중하는 기이한 장면들을 계속 바라만 보게 되는 여성민의 무대예술 <미자의 기분 같은 일>. 그래서 아무 것도 얻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느끼게 되는 시. 다시 말해서 두 손에, 가슴에 아무 것도 구체적으로 쥐어진 것 없음의 이 무료한 느낌은 독자인 나로 하여금 미자의 기분을 염탐하기에 충분했다.

 

이같이 무책임한 독법에 대하여 누가 나무란다 하더라도 나는 빠져나갈 이유가 충분히 있지,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이 시를 제대로 읽은 셈이 되는 것이라고 자부할 뿐.

(끝)

 


 

김영찬 시인(웹진 시인광장 主幹)

충남 연기에서 출생. 외국어대 프랑스語과 졸업. 2002년 《문학마당》과 2003년 《정신과 표현》에 작품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와 『투투섬에 안 간 이유』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