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재홍 시인 / 공포는, 무의식적인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5.

김재홍 시인 / 공포는, 무의식적인

 

 

        공포의 밤들아

        공포를 부르는 꿈들아

        공포를 옮기는 말들아

         

        공포는 의식적이지 않고

        또한 스피노자적이지 않고

         

        공포의 대립을 희망이라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어쩌면 봄은 봄이 아니며

        밤은 밤이 아닐지 모르지

         

        피부는 물집과 돌기로 들떠 일어나 있고

        작은 머리통들은 털구멍에서 나오지만*

        나는 나의 마비와 함께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어쩌면 공포는 희망은 봄은

        어쩌면 밤은 믿음은

         

        블랙홀에 빨려들어 간

        어떤 것도 나오지 못하지

        완전히 빨아들이므로 완전히 검지

         

        밤의 공포들아

        꿈이 풀어놓는 공포들아

        말이 옮겨놓는 공포들아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1930-1992), 『천 개의 고원』(김재인 역), 새물결, p.65-66.

 

계간 『시인수첩』 2018년 가을호 발표

 

 


 

 

김재홍 시인 / 인칭은 언제나

 

 

가령 이 세계가 우글거리는 이념들과 번쩍이는 어두운 전조들과 강도들과 문제들과 차이들의 무한한 일의성이라면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외친 김수영이라거나, 분노와 원한과 저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빨아올리고 뿜어대는 충만한 신체라면

 

혹은 부글부글 이글거리는 분화구거나 태풍이거나 그 눈동자거나 규정될 수 없는 규정되지 않는 규정할 수 없는 열정과 절망과 환희와 운명의 극한이라면

 

인칭은 언제나 펄펄 끓는 뜨거운 핏줄을 퉁기며, 그 박동과 함께 영혼과 함께 뛰어다니며 솟구치며 욕망하는 기계의 욕망하는 생산을 욕망할 수 있다면

 

계간 『미네르바』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재홍 시인 / 어느 현재주의자의 기록

 

 

        골 안에 살던 고란이모와 그녀의 남편 김명호 씨는

        차례로 몇 밀리그램의 영혼으로 돌아가

        매우 현재적인 자유를 구가하고 있을 것으로

         

        끊어질 듯 창재기의 고통의 시그널이 아니라

        식도를 태우며 내려가는 독극의 신호가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고공의 기운을 누리고 있을 것으로

         

        클리나멘 혹은 편위

        혼돈이라는 반자연주의를 위하여

        차원을 넘는 구원의 인간주의를 위하여

        두 영혼의 날렵한 활공 혹은

         

        지난날 그들이 살아낸 행적

        감자와 배추와 옥수수와 들깨와 콩

        염소와 개와 소와 꿩과 오소리와 쥐

         

        고란이모와 김명호 씨는 열차를 타고

        석포에서 법전으로 분천에서 태백으로

        쏟아지는 별이거나 빛나는 달이거나

        차라리 희망이거나 절망이거나 분노거나

         

        생체 운동의 완전한 분자화거나

        무념무상의 영혼의 상승이거나

        영구한 결별이거나 합일이거나

        차라리 영원회귀의 현재거나

 

계간 『동리목월』 2018년 겨울호 발표

 


 

김재홍 (金載弘) 시인

1968년 강원도 삼척에서 출생. 중앙대 문창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3년 《중앙일보》로 등단. 시집으로  『메히아』,  『다큐멘터리의 눈』,  『주름, 펼치는』이 있음. 2017년 박두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순영 시인 / 젖소  (0) 2019.02.26
강병길 시인 / 것  (0) 2019.02.26
이재연 시인 / 허공에 검은 선을 그으며  (0) 2019.02.25
한정원 시인 / 내포, 메타포  (0) 2019.02.25
송시월 시인 / 회전문  (0) 2019.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