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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순영 시인 / 젖소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6.

젖소

전순영 시인

 

 

        짜낸 젖이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돌면서

        달려드는 길과 결투를 하면서

        어둠의 아가리 속에서 어둠과 싸워야 했다

         

        어떤 이는 젖소가 욕심이 많으니 쏴 죽여야 한다고

        어떤 이는 우유를 짜낼 수 있으니 살려두어야 한다고

        어떤 이는 수레를 끌려야 한다고

         

        주인이 젖소 첫 단추를 뒤틀리게 달아놓고

        억지로 꿰맞추려고

        하얀 젖소의 목을 움켜쥐고 검은 젖을 담았다고

        젖소더러 검은 젖의 값을 내놓으라고

        젖소를 쏴 죽여야 한다고 몽니를 부리고

        젖소더러 이웃에 있는 풀까지 다 뜯어먹었으니 그

        풀 값을 내놓으라고 한다

         

        젖소를 때려잡으려면 때로는 사자를 빌려 오기도

        젖소가 피를 흘리거나 말거나

        젖이 까맣게 타버렸거나 말거나

        목을 비틀어 젖만 짜내려는 주인 욕심에 불이 붙었다

         

        젖소는 잠을 못자고 더 많은 어둠을 깨물어 삼키고

        군소리 없이 하얀 젖을 짜내야 한다

        지구를 등에 지고 변방으로 내몰리면서 ...

         

        양이나, 염소 토끼 닭이나 까치 비둘기 참새도

        마른 젖을 쥐여 짜이는 비명소리가 강을 적신다

        하늘도 한 번 안 쳐다보고

 

웹진 『시인광장』 2019년 2월호 발표

 


 

전순영 시인

1999년 《현대시학》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목이 마른 나의 샘물에게』와 『시간을 갉아먹는 누에』,  『숨』 등과 에세이집 『너에게 물들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