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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정옥 시인 / 꽃들의 역습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15.

안정옥 시인 / 꽃들의 역습

 

 

꽃은 이제 달빛이다

달빛을 그럴듯하게 찍어낸다

월광초(月光草)를 받아내려, 내가 그곳으로 가려면

몸을 달의 형상으로 휘어야 한다

 

한 송이 걸렸다

나는 얼마나 오래 떨리도록 꽃을 탐했나

책상 위의 꽃들이 시큼해질 때까지 묶어 두었다

꽃들은 내 슬픔의 지지대,

이런, 달빛만 끌어당기려 했는데 줄기까지 왔다

맺음을 망가뜨렸다고 바로 공격한다

줄기의 즙, 허연 독을 내 손 거쳐 얼굴로 보냈으니

꽃만 남들보다 돋보이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그걸 들여다 볼

 

거울이 세상엔 너무 흔하다는 것

수십 송이의 꽃들이 때로는

운명이 그곳에 있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달빛 타고 얼굴로 흘러 온

희끄무레한 독이 화끈거려라

절뚝이며 꽃들이 달빛 맞는 날

부글부글, 주위 꽃들마저 분질러 버리겠다

월광(月光)이 돋보이는 날 찾아 갈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꽃들을 어루었다

 

계간 『시와 반시』 2018년 봄호 발표

 


 

안정옥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0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1993)와 『나는 독을 가졌네』(1995), 『웃는 산』(1999), 『아마도』(2009)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