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 시인 / 가을의 노래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 뿐이로다.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어두움을 저어 시냇물처럼 저렇게 떨며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간다. 빗 방울처럼 이었는 슬픔의 나라 後園을 돌아가며 잦아지게 운다. 오로지 하나의 길위 뉘가 밤을 絶望이라 하였나. 말긋 말긋 푸른 별들의 눈짓 풀잎에 바람 살아 있기에 밤이 오고 동이 트고 하루가 오가는 다시 가을 밤 외로운 그림자는 서성거린다. 찬 이슬밭엔 찬 이슬에 젖고 언덕에 오르면 언덕 허전한 수풀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등불을 죽이고 寢室에 누워 호젓한 꿈 太陽처럼 지닌다. 허술한 허술한 풀벌레와 그림자와 가을밤.
1955년 월간 《현대문학》 박두진 시인 첫 추천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황토(黃土)길
낙엽진 오동나무 밑에서 우러러 보는 비늘구름 한 권 책도 없이 저무는 황톳길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 갔을까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 왔을까
쓸쓸한 흥분이 묻혀 있는 길 부서진 봉화대 보이는 길
그날사 미음들레꽃은 피었으리 해바라기 만큼한
푸른 별은 또 미음들레 송이 위에서 꽃등처럼 주렁주렁 돋아 났으리
푸르다 못해 검던 밤 하늘 빗방울처럼 부서지며 꽃등처럼 밝아오던 그 하늘
그날의 그날 별을 본 사람은 얼마나 놀랐으며 부시었으리
사면에 들리는 위엄도 없고 강 언덕 갈대닢도 흔들리지 않았고 다만 먼 화산 터지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서
귀대이고 있었으리 땅에 귀대이고 있었으리.
싸락눈, 삼애사, 1969
박용래 시인 / 땅
나 하나 나 하나뿐 생각했을 때 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
어슴푸레 등피(燈皮)처럼 흐리는 황혼(黃昏)
나 하나 나 하나만도 아니랬을 때 머리 위에 은하 우러러 항시 나는 엎드려 우는 건가
언제까지나 작별(作別)을 아니 생각할 수는 없고 다시 기다리는 위치(位置)에선 오늘이 서려 아득히 어긋남을 이어오는 고요한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지워 찬연히 쏟아지는 빛을 주워 모은다.
1955년 월간 《현대문학》 박두진 시인 천료 싸락눈, 삼애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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