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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천상병 시인 / 흐름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31.

천상병 시인 / 흐름

 

 

바다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동물도 흐르고

흐르는 것이 너무 많다

 

새는 날고 지저귀는데

흐름의 세계를

흐르면서 보리라.

 

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하느님! 하느님도 흐르시나요!

 

 


 

 

천상병 시인 / 허상(虛像)

-폭풍우-

 

 

'허리케인'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작으마한 섬을 몽땅 소멸케 하더군.

아무리 폭풍우가 고속(高速)이었다 하드라도.

 

여성대명사(女性代名詞)를 명칭케 하는 것은

폭풍우의 우력을 꺽어버리겠다는,

'사라'호니 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야.

 

풍속이 외상식(外商 )으로 빠른 거라네.

보통이면은 기풍(氣風)이 맞을 것 아냐?

지식답(知識答)이 빠르면은 고명(高名)한 석학이 되듯.

 

아기이름을 닮은 폭풍우를 만날 때까지

오래살면 좋다 뿐인겠는가.

섬을 날고 진문기답(珍門起畓)을 듣고 보고 들을 것이 아냐.

 

영화의 청년주인공은,

난관을 뚫고 그의 사랑이 이루어지지만은

나는 연인(戀人)도 없고 집도 없다.

 

 


 

 

천상병 시인 / 가요소야(歌謠小夜)

 

 

아슴스레, 노래가 들리다.

어디서냐, 지하에서냐, 지상에서냐!

땅 위는 소야가 한창이다.

 

 


 

 

천상병 시인 / 간봄

 

 

한때는 우주 끝까지 갔단다.

사랑했던 여인

한봄의 산 나무 뿌리에서

뜻 아니한 십 센티쯤의 뱀 새끼같이

사랑했던 여인.

그러나 이젠

나는 좀 잠자야겠다.

 

 


 

 

천상병 시인 / 갈대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천상병 시인 / 갈매기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

 

이제 波濤도

빛나는 가슴도

구름을 따라 먼 나라로 흘렀다.

 

그리하여 몇번이고

몇번이고

날아 오르는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천상병 시인 / 강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천상병 시인 / 계곡 흐름

 

 

나는 수락산 아래서 사는데,

여름이 되면

새벽 5시에 깨어서

산 계곡으로 올라가

날마다 목욕을 한다.

아침마다 만나는 얼굴들의

제법 다정한 이야기들.

 

큰 바위 중간 바위 작은 바위.

그런 바위들이 즐비하고

나무도 우거지고

졸졸졸 졸졸졸

윗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더러는 무르팍까지

잠기는 물길도 있어서......

(내가 가는 곳은 그런 곳)

목욕하고 있다 보면

계곡 흐름의 그윽한 정취여...... .

 

 


 

 

천상병 시인 / 고향

 

 

내 고향은 경남 진동(鎭東),

마산에서 사십 리 떨어진 곳

바닷가이며

산천이 수려하다.

 

국교 1년 때까지 살다가 떠난

고향도 고향이지만

원체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 말이다.

 

사실은 사람마다 고향타령인데

나도 그렇고 다 그런데,

태어나기 전의 고향타령이 아닌가?

나이들수록 고향타령이다.

 

무(無)로 돌아가자는 타령 아닌가?

경남 진동으로 가잔 말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의 고향 - 무(無)로의

고향타령이다. 초로(初老)의 절감(切感)이다.

 

 


 

 

천상병 시인 / 곡(哭) 석재대사(石齋大師)

 

 

선생님 이런 일이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는 다소

관상을 볼 줄 아는데

팔십까지는 무리없이 살리라

생각했는데,

조 선생님은

저가 얼마나 무식한 놈인가를

증명하셨습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식한 놈인데

저는 다시 무식하고 싶습니다.

연현(演鉉) 선생님!

왜 저 혼자 놔두고 가시나이까?

 

 


 

 

천상병 시인 / 곡(哭 ) 신동엽(申東曄)

 

 

어느 구름 개인 날

어쩌다 하늘이

그 옆얼굴을 내어보일 때.

 

그 맑은 눈

한곬으로 쏠리는 곳

네 무덤 있거라.

 

잡초 무더기

저만치 가장자리에

꽃 그 외로움에 자랑하듯

 

신동엽!

꼭 너는 그런 사내였다.

 

아무리 잠깐만이라지만

그 잠깐만 두어 두고

너는 갔다.

 

저쪽 저

영광의 나라로!

 

-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중(中)

 

 


 

천상병 [千祥炳, 1930.1.29 ~ 1993.4.28] 시인

1930년 일본 효고현(兵庫県)에서 출생.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신  담임교사이던 시인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誌에 초회 추천. 1951년 《문예》誌에  평론  〈나는  부하고 저항 할 것이다〉를 발표하며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주막에서』(민음사, 1979)와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답게, 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민음사) 등이 있음. 1993년 숙환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