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 / 창에서 새
어느날 일요일이었는데 창에서 참새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이런 부질없는 새가 어디 있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별일도 많다는데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한참 천장을 날다가 달아났는데 꼭 나와 같은 어리석은 새다. 사람이 사는 좁은 공간을 날다니.
천상병 시인 / 책미치광이
내 나이 이제 오십한살. 말썽꾸러기 내가 아직 한번도 안했던 자기자랑을 여기 적어 볼까 합니다. 자기자랑은 팔불출이지만 초로의 노인이 된 내가 어찌 불출이 되지 못하겠습니까?
국교 이학년때부터 나는 일본서 살았는데 어머니는 나를 '책 미치광이'라 불렀습니다. 미치광이라니 천만의 말씀! 읽어서 큰 공부되고 덕볼뿐만 아니라 재미만점이고 지식과 슬기를 주는 독서가 왜 미치광이란 말입니까!
국교 육년때 일이었는데 일본에서, 나 살던 곳은 치바켄 타태야마시 호오죠 동내였는데 그 역전 근처에 시립도서관이 있었고, 학교 파하면 나는 반드시 거기 갔었습니다. 다닌지 칠팔개월 지난 어느날, 아내하고 두사람뿐인 어른직원이, 목욕하고 온다고 하면서 도서관 지켜달라면서 서적 서가 열쇠를 내게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른은 시립도서관장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국교육년생이 단시간만이라도 시립도서관장 임시대행을 살짝 지냈다는 꼴이 아닙니까? 우스우면 우습고, 맹랑한 시간이었습니다.
천상병 시인 / 푸른 것만이 아니다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은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3월, 4월 그리고 5월의 신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던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천상병 시인 / 하느님 말씀 들었나이다.
1950년 10월 5일 정오경 나는 종로 2가 안국동쪽을 꺽고 있었습니다. 길꺽는 모퉁이에 한그루 가로수가 있었는데, 그 밑을 지나는 순간 하늘에서 낮으막하나, 그래도 또렷한 우리말로 '명상은 않되!'하는 말씀이 들리시더니 또 일분 후에 '팔팔까지 살다가, 그리고 더'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2천년만의 하느님 말씀입니다.
저는 몸둘 바를 모르고 그냥 길바닥에 주저 앉아 한참 명상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상병 시인 / 하늘.2
하늘은 가이없다. 무한한 하늘은 끝이 없다. 어디까지가 하늘이냐 두무지 알 수 없다.
구름은 떠가지만 그건 유한한 하늘이고 새는 날으지만 낮은 하늘이고 우리는 그저 하늘을 받들면 그만이다.
태양은 빛을 보내고 달도 빛을 보내지만 우리는 그 빛의 고마움을 모르고 그저 고맙다고만 한다.
천상병 시인 / 한가위 날이 온다
가을이 되었으니 한가위 날이 멀지 않았소. 추석이 되면 나는 반드시 돌아간 사람들을 그리워 하오.
그렇게도 사랑 깊으시던 외할머니 그렇게도 엄격하시던 아버지 순하디 순하던 어머니 요절한 조카 영준이! 지금 천국에서 기도 하시겠지요.
천상병 시인 / 한가지 소원(所願)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컷 살았나 싶다. 별다를 불만은 없지만,
똥걸래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는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천상병 시인 / 해변(海邊)
잡다한 직선이 모여 들어야만 이와같은 직평면체(直平面體)가 구성될 성싶은데, 그런 직선(直線)이라고는 도방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가난뱅이 시인이 다소곳하게, 눈꼴 사납게 직선(直線)의 자죽을 찾는 것도 할 수 없다. 저렇게 생기복(生起伏)을 이룬 가면노도(假面怒濤)가 탈이다. 오대양에 비교하면 턱도 없지만서도.
심연(深淵)이란 깊다는 것만이 이유가 아닐게다. 수심이 시꺼멓다고 깊이를 알게 뮈냐. 고심참담(故心慘憺)하게 알필요 없고 필요상 덮어두자.
천상병 시인 / 행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천상병 시인 / 허상(虛像). 4 -구름-
구름은 백색(白色)이요 비오는 날엔 회암색(灰暗色)이다. 중간치기 색채(色彩)는 없다. 그런데 형태(形態)는 실로 각종각류(各種各類)다.
불교적이 아닐까. 기독교를 닮았기도 할까. 마호멧교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하늘의 높음과 지상평면(地上平面)과의 연합체다. 마음대로 인간을 굽어삼킨다. 외양(外樣)은 부드러운 것 같지만은 단단할지 모른다.
이것은 아무래도 고체인가 액체인가. 전체로는 고체요 부분으로는 액체다. 기체에 쌓였으면서도 증류수(蒸溜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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