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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천상병 시인 / 어머니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9.

천상병 시인 / 어머니

 

 

내가 40대때

돌아가신 어머니.

 

자꾸만 자꾸만 생각납니다.

나이가 60이 됐으니까요!

 

살아계실 땐 효도(孝道)한번 못했으니

얼마나 제가 원통하겠어요 어머니!

 

 


 

 

천상병 시인 / 어머니 변주곡(變奏曲) . 4

 

 

어머니는 앓다가 저 세상(世上)으로 가셨다.

둘째 누이의 이실직고(以實直告)로는

거의 괴로울대로 괴로웠단다.

 

불행(不幸)한 일이다.

만사에 있어 무사태평(無事泰平)했던 당신께서

임종기(臨終期)가 그랬다니 아들인 나는 쥬피터에게

항의(抗議)하고 싶다.

 

살결이 다소 나와 닮아서 검었다는 것 말고는

신체조건(身體條件)은 깨끗하셨고 훌륭했었다.

그런데도 그 그런 고달픈 충격의 고역(苦役)이었다니

 

성서(聖書)의 전면(全面)을 들쳐 읽어도

그러한 대목과 만날 수는 없어도

확실한 사실은 그녀는 천사(天使)의 부흥(復興)이었다는

것 뿐이다.

 

 


 

 

천상병 시인 / 요놈 요놈 요놈아!

 

 

집을 나서니

여섯 살짜리 꼬마가 놀고 있다.

 

'요놈 요놈 요놈아!'라고 했더니

대답이

'아무것도 안사주면서 뭘'한다.

그래서 내가

'자 가자

사탕 사줄게' 라고 해서

가게로 가서

 

사탕을 한봉지

사 줬더니 좋아한다.

 

내 미래의 주인을

나는 이렇게 좋아한다.

 

 


 

 

천상병 시인 / 유관순 누님

 

 

이화 학당의 학생이었으니

내게는 누님이 되오.

 

누님! 참으로 여자의 몸으로

용감하였소.

 

일제의 총칼앞에서

되려 죽음을 택하셨으니

 

온겨레가

한결같이 우러러 보오.

 

이제는 독립 되었으니

저승에서도 눈을 감으세요.

 

(91년 3.1절에)

 

 


 

 

천상병 시인 / 자연의 은혜

-서울의 소년소녀들에게-

 

 

애들아 들어라

이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라.

지금은 12월 겨울이지만

이윽고 내일

봄이 온다.

 

자연은 커다란 문을 열고

자연의 은혜를

활짝 열어 줄 것이다.

 

산이나 들에

꽃이 만발하고

싱싱한 나무가

너희들을 맞이할 것이다.

 

자연의 은혜는

너무도 넓고 기쁘다.

시골에 가서

그 자연의 은혜를

맛보아라.

 

바람에도 길이 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천상병 시인 / 장마

 

 

7월장마 비오는 세상

다 함께 기 죽은 표정들

아예 새도 날지 않는다.

 

이런날 회상(回想)은 안성맞춤

옛친구 얼굴 아슴프레 하고

지금에사 그들 뭘 하고 있는가?

 

뜰에 핀 장미는 빨갛고

지붕밑 제비집은 새끼 세 마리

치어다 보며 이것저것 아프게 느낀다.

 

빗발과 빗발새에 보얗게 아롱지는

젊디 젊은 날의 눈물이요 사랑

이 초로(初老)의 심사(心思) 안타까워라-

오늘 못다하면 내일이라고

그런 되풀이, 눈앞 60고개

어이할거나

이 초로의 불타는 회한(悔恨)-

 

 


 

 

천상병 시인 / 조류(潮流).2

 

 

이 조류란 놈의 길이는 얼마만큼 장거리 일까.

폭은 또한 얼마나 될 것이냐.

같은 거리를 시종일관(始終一貫)해서 왕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다. 유역(流域)은 있다. 있기는 있되 어느쪽인지는 도방 알길이 없구나.

꼭 선사기(先史期) 이전의 신화시대를 눈앞에 방불하는 것 같다.

그 당시의 인물들처럼 똑똑하게 떠오른다.

그러니 그당시의 바다가 똑바로 조류가 아니었드냐.

자기자신의 깊숙한 심정처럼 유쾌하고 선명했을지도 모른다.

 

 


 

 

천상병 시인 / 주일

 

 

오늘같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성당 입구 바로 앞

저는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구 지키는 교통순경이

닦기 끝나면 저도 닦으려고요

 

교통순경의 그 마음가짐보다

저가 못한데서야 말이 아닙니다

 

오늘같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천상병 시인 / 집.1

 

 

형님의 집은 부산시 동구 수정4동 97.

크잖고 적잖고 중류의 2층이다.

별불편이 없는 것이 탈이면 탈일까.

 

다소 높아서 해변항구가 뜰이나 마찬가지.

망망(茫茫)히 넓은 뜰이라서 자랑이다.

일본까지 옆집이나 다름이 없지.

 

나는 조카들 세놈과 사이가 좋지.

형이나 형수하고는 그렁저렁이지만.

재미도 있고 흥미롭고 귀엽기 짝이 없다.

 

삼촌인 나는 집도 절도 없는 쌍놈이지만,

조카들은 그런 것 따지지 않는다.

십원이 있으면 인기(人氣)를 끌텐데.....

 

 


 

 

천상병 시인 / 집.2

 

 

가정이라는 것이 화평(和平)할 때는

집이 평화롭고 태평할 때.

나는 시만을 짓고 있어도 될텐데......

 

나는 유명한 시인으로 자처(自處)하니

건덕지도 없이 오만불손하며

그런대로 가만히 놔 주면 그만이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카들은 아랑곳 없이

나에게만 덤빈다.

 

어떻게 되는지 이건 내집이 아니야.

그러니 나도 또한 소극적일 수밖에.

조카들아 집과 나를 혼동(混同)하지 말아라.

 

 


 

천상병 [千祥炳, 1930.1.29 ~ 1993.4.28] 시인

1930년 일본 효고현(兵庫県)에서 출생.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신  담임교사이던 시인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誌에 초회 추천. 1951년 《문예》誌에  평론  〈나는  부하고 저항 할 것이다〉를 발표하며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주막에서』(민음사, 1979)와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답게, 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민음사) 등이 있음. 1993년 숙환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