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 / 미소 -새-
1
입가에 흐뭇스레 진 엷은 웃음은, 삶과 죽음 가에 살짝 걸린 실오라기 외나무 다리.
새는 그 다리 위를 날아간다. 우정과 결심, 그리고 용기 그런 양 나래 저으며......
풀잎 슬몃 건드리는 바람이기보다 그 뿌리에 와 닿아 주는 바람 이 가슴팍에서 빛나는 햇발.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갈 풀밭 길에서 입가 언덕에 맑은 웃음 몇번인가는......
2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언덕에서 언덕으로 가기에는 수많은 바다를 건너야 한다지만
햇빛 반짝이는 언덕으로 오라 나의 친구여....
천상병 시인 / 백조(白鳥) 두 마리
내게는 백조(白鳥) 두 마리가 있다. 그림이지만 참 좋다.
이유를 밝히면 '시조와 비평'이란 잡지의 창간호 표지에 그려졌는데
표지전체가 녹색이라서 약간 녹색조(綠色調)는 감출 수 없지만 그래도 백조는 백조다.
나는 이 그림을 참 좋아한다. 두 마리의 백조(白鳥)는 부부(夫婦)처럼 보인다. 너무나 사이가 좋아서 그런지 두 마리가 다 울고 있다. 기쁨에 못이긴 울음이리라.
천상병 시인 / 봄빛
오늘은 91年 4月 14日이니 봄빛이 한창이다.
뜰의 나무들도 초록색으로 물들었으니 논에 참 좋다.
어떻게 봄이 오는가? 그건 하느님의 섭리이다.
인생을 즐겁게 할려고 봄이오고 꽃이 피는 거다.
천상병 시인 / 비
빗물을 대단히 순진무구하다. 하루만 비가 와도, 어제의 말랐던 계곡물이 불어 오른다.
죽은 김관식은 사람은 강가에 산다고 했는데, 보아하니 그게 진리대왕이다.
나무는 왜 강가에 무성한가 물을 찾아서가 아니고 강가의 정취를 기어코 사랑하기 때문이다.
천상병 시인 / 삼청공원에서 - 어머니 가시다
1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공원으로 서울에서 제일 외로운 사나이가 왔다. 외롭다는 게 뭐 나쁠 것도 없다고 되뇌면서...... 이맘때쯤이 그곳 벗나무를 만발하게 하는 까닭을 사나이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벗꽃 밑 벤취에서 滿山을 보듯이 겨우 의젓해지는 것이다. 쓸쓸함이여, 아니라면 외로움이여, 너에게도 가끔은 이와 같은 빛 비치는 마음의 계절은 있다고, 그렇게 노래할 때도 있다고, 말 전해다오.
2
저 벚꽃잎 속에는 십여 년 전 작고하신 아버지가 생전의 가장 인자했던 모습을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고, 여섯에 요절한 조카가, 갓 핀 어린 꽃잎 가에서 파릇파릇 웃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천상병 시인 / 새
최신형기관총좌(最新型機關銃座)를 지키던 젊은 병사는 피 비린내 나는 맹수(猛獸)의 이빨같은 총구옆에서 날아온 한 마리 새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산골 출신인 그는 새에게 온갖 아름다운 관심을 쏟았다. 그 관심은 그의 눈을 충혈케했다. 그의 손은 서서히 움직여 최신형기관총구(最新型機關銃口)를 새에게 겨냥하고 있었다. 피를 흘리며 새는 하늘에서 떨어졌다. 수풀 속에 떨어진 새의 시체는 그냥 싸늘하게 굳어졌을까. 온 수풀은 성(聖)바오로의 손바닥인 양 새의 시체를 어루만졌고 모든 나무와 풀과 꽃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부르짖었다. 죄없는 자의 피는 씻을 수 없다. 죄없는 자의 피는 씻을 수 없다.
천상병 시인 / 새소리
새는 언제나 명랑하고 즐겁다. 하늘밑이 새의 나라고, 어디서나 거리낌 없다. 자유롭고 기쁜 것이다.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울음소리일지 모른다고
어떤 시인이 했는데, 얼빠진 말이다.
새의 지저귐은 삶의 환희요 기쁨이다. 우리도 아무쪼록 새처럼 명랑하고 즐거워하자!
즐거워서 내는 소리가 새소리이다. 그 소리를 괴로움으로 듣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놈이냐.
하늘 아래가 자유롭고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는 새는 아랫도리 인간을 불쌍히 보고 아리랑 아리랑하고 부를지 모른다.
천상병 시인 / 서대문에서 -새-
지난날, 너 다녀간 바 있는 무수한 나뭇가지 사이로 빛은 가고 어둠이 보인다. 차가웁다. 죽어가는 자의 입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소슬하고, 한번도 정각을 말한 적없는 시계탑 침이 자정 가까이에서 졸고 있다. 계절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너 새여......
천상병 시인 / 小陵調 - 七十年 秋夕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시인 / 술
술 없이는 나의 생을 생각 못한다. 이제 막걸리 왕대포집에서 한잔 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젊은 날에는 취하게 마셨지만 오십이 된 지금에는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하다.
아내는 이 한잔씩에도 불만이지만 마시는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천상병 시인 / 신부에게
온실에서 갖나온 꽃인양 첫걸음을 내디딘 신부여 처음 바라보는 빛에 눈이 부실 테지요. 세상은
눈부시게 밝은 빛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빛도 있답니다. 또한 기쁜 일도 있을 것이고 슬픈 일도 있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쓴맞이 더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은 괴로움만도 또한 아닙니다.
신부님 곁에는 함께 살아갈 용감하고 튼튼한 신랑이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고 양보하며는 더 큰 복을 받을 테지요. 신부여,
성실과 진실함이 함께 한다면 두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용기와 힘을 합쳐 보세요. 그러면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이며 튼튼한 열매가 맻어질 것입니다.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상병 시인 / 어머니 외 9편 (0) | 2019.05.29 |
---|---|
조향 시인 / 장미와 수녀의 오브제 외 3편 (0) | 2019.05.28 |
천상병 시인 / 독자들에게 외 9편 (0) | 2019.05.27 |
홍사용 시인 /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외 2편 (0) | 2019.05.27 |
천상병 시인 / 나무 외 9편 (0) | 2019.05.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