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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홍사용 시인 /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7.

홍사용 시인 / 나는 왕(王)이로소이다

- 노작 홍사용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서요’하는 그 소리였지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내(洞內)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빨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 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 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스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 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버리었소이다.

울음의 뜻을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正月) 열나흩 날 밤, 맨재텀이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군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뭇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 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둣군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풀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寒食)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었소이다.

누-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실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將軍)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世上) 어느 곳에든지 설음이 있는 땅은

모다 왕의 나라로소이다.

 

 


 

 

홍사용 시인 / 어부(漁父)의 적(跡)

 

 

냇가 버덩 늙은 솔 선 흰 모래밭에

텃마당같이 둥그레 둘러 어른의 발짝이 있다

아마도 여울목을 지키고 고기잡이 하던 낯모르는 사내가

젖은 그물을 말리느라고 예다가 널고서

물 때 오른 깜정 살을 빨가둥 벗고서

남 안 보는 김에 좋아라고 뛰놀았던 게로군

옳지 옳지 그런 때 그런 때

한 웅큼 왕모래를 끼얹었으면

(아마 미워 죽겠지)

그러나 어여쁜 님이라 하면

(아주 좋아 죽겠지)

 

(『白潮』 1호, 1922년 1월)

 

 


 

 

홍사용 시인 /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시냇물이 흐르며 노래하기를

외로운 그림자 물에 뜬 마름잎

나그네 근심이 끝이 없어서

빨래하는 처녀를 울리었도다

 

돌아서는 님의 손 잡아다리며

그러지 마셔요 갈 길은 육십 리

철없는 이 눈이 물에 어리어

당신의 옷소매를 적시었어요

 

두고 가는 긴 시름 쥐어틀어서

여기도 내 고향 저기도 내 고향

젖으나 마르나 가는 이 설움

혼자 울 오늘 밤도 머지않구나.

 

 


 

홍사용 시인[洪思容, 1900.5.17~1947.1.7]

1900년 수원(水原: 현재의 화성시)에서 출생. 호는 호는 노작(露雀).  휘문의숙(徽文義塾) 졸업.1922년 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 등과 동인지 《백조(白潮)》를 창간.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향토적이며 감상적인 서정시를 발표. 신극운동(新劇運動)에도 참여하여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이끌었고 희곡도 썼음.

시·수필·희곡 등 발표 작품은 많지만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은  없고  폐병으로  세상을 떠남. 2002년 노작문학상이 제정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