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시인 /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세 사람의 가족
나와 나의 청순한 아내 여름날 순백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유행품(流行品)으로 화려한 상품의 쇼우윈도우를 바라보며 걸었다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평범한 수확의 가을 겨울은 백합처럼 향기를 풍기고 온다 죽은 사람들은 싸늘한 흙 속에 묻히고 우리의 가족은 세 사람
토르소 그늘 밑에서 나의 불운한 편력인 일기책이 떨고 그 하나 하나의 지면은 음울한 회상의 지대로 날아갔다
아 창백한 세상과 나의 생애에 종말이 오기전에 나는 고독한 피로에서 빙화(氷花)처럼 잠들은 지나간 세월을 위해 시(詩)를 써본다.
그러나 창 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박인환 시선집, 산호장, 1955
박인환 시인 / 낙하
미끄럼판에서 나는 고독한 아킬레스처럼 불안의 깃발 날리는 땅 위에 떨어졌다 머리 위의 별을 헤아리면서
그후 20년 나는 운명의 공원 뒷담 밑으로 영속된 죄의 그림자를 따랐다 아 영원히 반복되는 미끄럼판의 승강 친근에의 증오와 또한 불행과 비참과 굴욕에의 반항도 잊고 연기 흐르는 쪽으로 달려가면 오욕의 지난날이 나를 더욱 괴롭힐 뿐 멀리선 회색사면과 불안한 밤의 전쟁 인류의 상흔과 고뇌만이 늘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망각의 이 지상에서 더욱 더욱 가라앉아 간다
처음 미끄럼판에서 내리달린 쾌감도 미지의 숲 속을 나의 청춘과 도주하던 시간도 나의 낙하하는 비극의 그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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