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 / 구름
저건 하늘의 빈털터리꽃 뭇사람의 눈길 이끌고 세월처럼 유유하다.
갈 데만 가는 영원한 나그네 이 나그네는 바람 함께 정처없이 목적없이 천천히
보면 볼수록 허허한 모습 통틀어 무게없어 보이니 흰색 빛깔로 상공(上空) 수놓네.
천상병 시인 / 국화꽃
오늘만의 밤은 없었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만이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천상병 시인 / 그날은 -새-
이제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샤쓰같이 당한 그날은......
이제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천상병 시인 / 길
가도 가도 아무도 없으니 이 길은 無人의 길이다. 그래서 나 혼자 걸어간다. 꽃도 피어 있구나. 친구인 양 이웃인 양 있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꽃의 생태여 - . 길은 막무가내로 자꾸만 간다. 쉬어 가고 싶으나 쉴 데도 별로 없구나. 하염없이 가니 차차 배가 고파온다. 그래서 음식을 찾지마는 가도 가도 무인지경이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한참 가다가 보니 마을이 아득하게 보여온다. 아슴하게 보여진다. 나는 더없는 기쁨으로 걸음을 빨리빨리 걷는다. 이 길을 가는 행복함이여.
천상병 시인 / 김관식의 입관
심통한 바람과 구름이었을 게다. 네 길잡이는. 고단한 이 땅에 슬슬 와서는 한다는 일이 가슴에서는 숱한 구슬. 입에서는 독한 먼지. 터지게 토해 놓고, 오늘은 별일 없다는 듯이 싸구려 관 속에 삼베옷 걸치고 또 슬슬 들어간다. 우리가 두려웠던 것은, 네 구슬이 아니라, 독한 먼지였다. 좌충우돌의 미학은 너로 말미암아 비롯하고, 드디어 끝난다. 구슬도 먼지도 못 되는 점잖은 친구들아, 이제는 당하지 않을 것이니 되려 기뻐해 다오. 김관식의 가을바람 이는 이 입관을.
천상병 시인 / 김종삼(金宗三)씨 가시다
종삼 형님 가시다. 그렇게도 친했고 늘 형님 형님으로 부르던 종삼 형이 드디어 가시다.
언제나 고전음악을 좋아했고 사랑한 종삼 형은 너무나 선량하고 순진하던 우리의 종삼 형이 천국에 가셨다.
내가 늘 신세졌고 가르침을 주던 종삼 형 참으로 다감하고 다정하던 종삼 형 말없던 그 침묵의 사나이 언제 내가 죽어서 다시 만나랴?
-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중(中)
천상병 시인 / 김형(金兄)
나는 일주일에 네번 다섯번은 기원(棋院)에 나갑니다. 김형(金兄)은 더 자주 나오는 사람인데 장애자에 속할 것입니다. 등이 약간 굽어져 있으니까요. 그러나, 김형(金兄)은 어찌 그리도 마음씨가 곱고 바둑도 아주 센 급(級)인데 꼭 이기겠다는 생각없이 여유있게 너그럽게 두기만 합니다.
UN이 올해는 '장애자의 해'라고 못 박았는데 휴머니즘이 드디어 발화(發火)했습니다. 인류가 비로소 눈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잠에서 깨어 났습니다.
언제나 김형(金兄)은 떳떳하고 으젓하니 - 되려 내가 장애자 같구나!
- 제2부. 젊을을 다오! 중(中)
천상병 시인 / 꽃은 훈장
꽃은 훈장이다. 하느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훈장이다. 산야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
사람은 때로 꽃을 따서 가슴에 단다. 훈장이니까 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의젓한 일인가.
인류에게 이런 은총을 내린 하느님은 두고 두고 축복되어 마땅한 일이다. 전진을 거듭하는 인류의 슬기여.
천상병 시인 / 나는 행복(幸福)합니다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幸福)합니다. 아내가 돈을 버니까!
늙은이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싫어지고 그저 드러누워서 KBS 제1FM방송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이 최고(最高)의 즐거움이오. 그래서 행복(幸福).
텔레비전의 희극(喜劇)을 보면 되려 화가 나니 무슨 지랄병(病)이오?
세상은 그저 웃음이래야 하는데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찌 어기겠어요?
행복은 충족입니다. 나 이상의 충족이 있을까요?
- 제5부. 내 영혼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때 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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