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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수영 시인 / 달나라의 장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5.

김수영 시인 /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김수영 시인 /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 시인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르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金洙暎, 1921. 11. 27 ~ 1968. 6. 16] 시인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 1946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하였으나 중퇴. 1946년 《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 <廟庭(묘정)의 노래>를 실으면서 작품 활동 시작. 1959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시와 시론, 시평 등을 잡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으나, 1968년 6월 15일 밤 교통사고로 사망.

사후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4) , 『사랑의 변주곡』(1988) 과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등과 1981년 『김수영전집』 간행됨. 2001년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 추서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