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 / 가족
우리집 가족이라곤 1989년 나와 아내와 장모님과 조카딸 목영진 뿐입니다.
나는 나대로 원고료(原稿料)를 벌고 아내는 찻집 '귀천(歸天)'을 경영하고 조카딸 영진이는 한복제작으로 돈을 벌고
장모님은 나이 팔십인데도 정정 하시고... .
하느님이시여! 우리가족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 제1부. 좋다 좋다 다좋다! 중(中)-
천상병 시인 / 간의 반란
육십 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걱정할 거 없네, 그러면 어쩌지요? 될 대로 될 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쪼무래기가 뭘 할까만은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원래 쿠데타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수습을 늙은 의사에게 묻는데, 대책이라고는 시간 따름인가!
천상병 시인 / 계곡물
평면적으로 흐르는 으젓한 계곡물. 쉼 없이 가고 또 가며, 바다의 지령대로 움직이는가! 나무 뿌리에서 옆으로 숨어서 냇가에 이르고, 냇가에서 아래로만 진군하는 물이여
사랑하는 바위를 살짝 끼고, 고기를 키우기도 하며, 영원히 살아가는 시냇물의 생명이여!
천상병 시인 / 고목
나는 삼십살 후반기에, 키엘케고올 전문가이자 우수한 평론가인 민병산(閔丙山)선생님(작고)의 권에 따라서 청주로 여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서 만났던 민선생님의 친구분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다정다감하고 훌륭했을까요? 나는 그 친구분네들의 귀띔으로, 만석(萬石)꾼의 큰아들이 바로 민선생님인 줄 알았습니다.
청주의 여기 저기 보여 주면서 어느 곳으로 데려 가더니, 낡고 낡은, 영 허물어질 것 같은 나무를 보였습니다. 병산(丙山)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약 5백년된 나무라고 하더군요! 그렇지만 나는 따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 이상 되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복고주의자(復古主義者)입니다.
옛사람들이 오늘사람보다 더 행복했을 거라고요! 옛사람들은 부산에서 서울 오는데 걸어서 왔습니다. 길을 가면서 주막이 있으면, 들러서 한잔하고, 여유만만하게 서울에 닿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복고주의자(復古主義者).
그 나무를 이리 저리 돌며, 바라보다가 '5백년'이 바로 이거로구나 하고 감탄 탄복했습니다.
- 제3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중(中)
천상병 시인 / 고목 2
이 고목은 볼수록 하늘 날씨를 지시하는 것 같다. 오늘은 맑은 날씨다.
내 그늘이 길다. 바둑이가 신기한 듯, 쳐다본다. 꼬리를 살살 흔든다.
날씨까지 지시하니, 무엇을 못 할 것인가...... 말을 못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천상병 시인 / 고향사념(故鄕思念)
내 고향은 강원 창원군 진동면. 어린 시절 아홉 살 때 일본으로 떠나서, 지금은 서울 사는 나는 향리 소식이 소연(消然)해 - 어른 되어 세 번쯤 갔다 왔지만 옛이 안 돌아옴은 절대진리(絶對眞理)니 어찌 할꼬? 생각건대 칠백 리 밖 향수 뭘로 달래랴...... 원(願)하고니 향토당산(鄕土堂山)에 죽어 묻히고파. 바다가 멀찌감치 보일듯 말듯 청명천연(淸明天然)에......
천상병 시인 / 고향이야기
내 고향은 세군데나 된다. 어릴때 아홉살까지 산 경남 창원군 진동면이 본 고향이고 둘째는 대학 2학년때까지 보낸 부산시이고 셋째는 도일(渡日)하여 살은 치바켄 타태야마시이다. 그러니 고향이 세군데나 된다.
본 고향인 진동면은 산수(山水)가 아름답고 당산(堂山)이 있는 수려한 곳이다. 바다에 접해 있어서 나는 일찍부터 해수욕을 했고 영 어릴때는 당산(堂山)밑 개울가에서 몸을 씻었었다.
제2고향은 부산시 수정동(釜山市 水晶洞)인데 산중턱이라서 오르는데 힘이 들었다.
제3의 고향인 일본 타태야마시에서는 국민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살았는데 일본에서도 명소(名所)다. 후지산이 멀리 바라 보이고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요, 해군 비행장이 있어서 언제나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 제2부. 젊을을 다오! 중(中)
천상병 시인 / 곡(哭) 정용해(鄭龍海)
부산의 문화계 인재 정용해(鄭龍海)형님이 드디어 타계(他界)했단다.
1986년도에 내가 에덴공원에서 시화전(詩畵展)을 열었을 때 에덴공원 가까이 자기집이 있다고 자기집에 있으라고 강요한 정용해형님!
그 호의(好意)에 못이겨 그만 일주인간 정용해형님댁에서 묵었었다.
정용해형의 손자 욱진이가 어찌나 귀엽고 개구장인지 나는 조금도 심심할 때가 없었었다.
정용해씨는 이렇게 문화계의 왕초같았던 부산의 명인이었다.
아 이제 갔으니 어찌하랴. 다리가 아픈 나는 장례식에도 못가겠으니 아내를 대신 보낼까 한다.
정용해형! 저승에서도 거물노릇 하시오.
- 제3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중(中)
천상병 시인 / 공상
- 나는 며칠 동안 공상을 먹으며 살았다
기어이 스며드는 것
절벽 위에서 아슬한 그 절벽 위에서
아! 저 화원입니다 저 처녀입니다
- 붉고 푸르고 누른 내 마음의 마차여
오늘은 또 어디메로 소리도 없이 나를 끌고 가는가
천상병 시인 / 광화문에서
아침길 광화문에서 <눈물의 여왕> 그녀의 장례 행진을 본다. 만장이 나부끼고, 악대가 붕붕거리고, 여러 대의 차와 군중이 길을 메웠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죽은 내 아버지도 <눈물의 여왕>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댔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문인들 장례식도 예총광장에서 더러 있었다. 만장도 없고, 악대는커녕, 행진은커녕 아주 형편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임이었다. 그 초라함을 위해서만이 그들은 <시>를 썼다.
천상병 시인 / 교황 바오르 6세 서거(逝去)
한 이백 년 전쯤에 다산 정약용은 초기 카톨릭 신도. 나 또한 이십 년 전부터 카톨릭 말석(末席) 오늘 1978년 8월 7일 바오로 교황 서거 소식 듣는다. 한 십오 년 전에 교황으로 오르신 바오로 6세는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이십세기 후반을 하느님 길로 인도하려다가 세월에 못이겨 드디어 천국 가시다. 중동문제와 인도지나 전쟁에 골머리 깊이 썩히신 바오로 6세는 현대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주님의 거룩하신 영단(英斷)을 희구(希求)하다가 드디어 몸소 하늘나무 나라로 - 이성보다는 정신을 차리라고 먼 곳 불 같은 멸망이 아니고 자기자신이 불 속에 있음을 깨치라고 살아날 길은 오직 천주님의 길이라고 바오로 교황님의 하교하심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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