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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정지용 시인 / 향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3.

정지용 시인 /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시인 /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 ㅅ 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시인 / 유리창 2

 

 

내어다 보니

아주 캄캄한 밤,

어험스런 뜰앞 잦나무가 자꼬 커올라간다.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나는 목이 마르다

또, 가까이 가

유리를 입으로 쫒다.

아아, 항 안에 든 금붕어처럼 갑갑하다.

별도 없다. 물도 없다. 쉬파람 부는 밤.

소증기섯처럼 흔들리는 창.

투명한 보랏빛 누뤼알 아,

이 알몸을 끄집어내라, 때려라, 부릇내라.

나는 열이 오른다.

뺌은 차라리 연정스레히

유리에 부빈다. 차디찬 입맞춤을 마신다.

쓰라리, 알연히, 그싯는 음향-

머언 꽃!

도회에는 고운 화재가 오른다

 

 


 

정지용[鄭芝溶, 1902.5.15 ~ 1950.9.25] 시인

1902년 충북 옥천 에서 출생. 휘문고보 재학 시절《서광》창간호에 소설 〈삼인〉을 발표하였으며, 일본 유학시절에는 대표작의 하나인 〈향수〉를 썼음. 1930년에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전개, 해방이 되서는 이화여대와 서울대에 출강하여 시론, 수필, 평문을 발표.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알지 못하나 북한이 최근 발간한 조선대백과사전에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기록되어 있음. 주요 저서로는 『정지용 시집』, 『백록담』, 『지용문학독본』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