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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유치환 시인 / 생명의 서(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2.

유치환 시인 /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柳致環, 1908. 7.14 ~ 1967. 2.13) 시인

1908년 경남 충무에서 출생. 동래보고 졸업. 연희전문에서 수학. 《문예월간》 1931년 12월호에 <정적>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미루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음. 장응두. 최상규  등과  동인지 『생리』를 발행.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아세아자유문학상. 예술원상 수상. 1967년 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