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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용악 시인 / 버드나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1.

이용악 시인 / 버드나무

 

 

누나랑 누이랑

뽕 오디 따러 다니던 길가엔

이쁜 아가씨 목을 맨 버드나무

 

백년 기대리는 구렝이 숨었다는 버드나무엔

하루살이도 호랑나비도 들어만 가면

다시 나올 상 싶잖은

검은 구멍이 입 벌리고 있었건만

 

북으로 가는 남도치들이

산길을 바라보고선 그만 맥을 버리고

코올콜 낮잠 자던 버드나무 그늘

 

사시사철 하얗게 보이는

머언 봉우리 구름을 부르고

마을선

평화로운 듯 밤마다 등불을 밝혔다


오랑캐꽃, 아문각, 1947

 

 


 

 

이용악 시인 /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띠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 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출전 : 시집 '오랑캐꽃'(1947)

 

 


 

 

이용악 시인 /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으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 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 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 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출전 : 시집 '낡은 집'(1938)

 

<해설>

이 시는 강을 의인화하여 화자의 감정을 이입시킨 작품이다. 두만강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지켜보고 증거해 주는 상징물로 이해된다.

 

제1연은 죄인처럼 수그리고 코끼리처럼 말이 없는 작중 화자가 만주행 유이민 열차에 몸을 싣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간다. '자랑도 자유도 없이'라는 진술로 보아 화자의 굴욕적인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제2연의 얼어붙은 두만강은 저 깊은 강 밑바닥에 또 다른 한 줄기의 물줄기가 쉬지 않고 은밀히 바다로 흘러간다. 가야 할 역사의 흐름, 결코 역사는 단절될 수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제3연은 바람이 이리처럼 혹독하게 불어 대는 벌판에 작중 화자의 넔이 우리 민족의 욕된 운명에 대한 죄인으로서의 자괴시모가 죄책감을 안고 얼어붙은 듯 서 있다.

 

제4연은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오늘날과 같은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강, 두만강아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화자는 외친다. 준엄한 자기 질책과 자기 반성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 제5연은 결국 마음의 눈을 덮어 줄 검은 날개를 희구하고 있다. 절망적인 현실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일 터이다. 그러나 작중 화자의 미미한 힘으로는 욕된 역사의 흐름을 극복할 길이 없다. 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그는 울 수도 없어 외롭다.

 

 


 

 

이용악 시인 /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굽이 돌아간

백선무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누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이용악 시인 / 낡은 집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 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 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 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항한 발자국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낡은 집, 삼문사, 1938

 

<해설>

이 시는 고향 마을의 흉가라고 꺼리는 낡은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제의 압제를 피해 고향을 뒤로 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떠돌던 수많은 유이민(유이민)들의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설화성은 이야기 줄거리에서 감지할 수 있다.

 

퇴락한 낡은 집에는 털보네가 살아왔고 그 집 아들은 화자인 '나'의 친구였으며, 그 친구가 아홉 살 되던 해 겨울, 그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1930년대 후반의 삶의 고달픔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흉가라고 꺼리는 '낡은 집'은 곧 우리 민족 )(주로 농민들)의 몰락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또한 '항구'는 식민지 수탈의 상징적 공간으로서, 농민들의 피땀어린 농산물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실려 나가던 곳이다. '늙은 둥글소'가 일제의 수탈에 등이 흰 농민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면, 시름시름 타들어가는 '저릎등'은 속타는 농민의 심정을 생각케 한다.

 

 


 

 

이용악 시인 /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오도 못할 우라지오.

 

 - <분수령>(1937)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베리아의 이국 땅에서 떠돌며 자신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내용으로, 일제 강점하에 의해 가족이 해체된 우리 민족의 슬픔과 한을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우라지오(블라디보스톡)는 화자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로만 듣고 동경하던 도시이다. 그 곳은 식민지하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였다. 그러나 그 곳에는 '찔레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는 추위와 외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화자는 그러한 현실과 당당히 맞서 후회없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고향의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깊어만 가고, 화자는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의 부두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런 제약없이 공중으로 날아다니는 멧비둘기처럼 가족들에게 돌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하지만, 우라지오의 바다는 두껍게 얼어붙어 있고 드나드는 배가 하나도 없는 지금, 화자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고향에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시인

1914년 함북 경성 출생.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일제시대 조선인의 궁핍한 삶과 현실을 개인적 체험에서 오는 구체성과 합친 시들을 발표.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활동. 1949년 8월 경찰에 체포된 후 10년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출옥 후 월북. 1971년 북한에서 폐병으로 작고. 시집으로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이 있음. 1957년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리용악시선집』을 펴냄. 중앙신문 기자, 문화일보 편집국장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