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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천상병 시인 / 나무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6.

천상병 시인 / 나무

 

 

누가 심었더란 말인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도

나무는 있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누가 심었더란 말이냐?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다만 하느님이 심으셨다는 생각이

굳어갈 뿐이다.

보살피는 것도 하느님이다.

 

 


 

 

천상병 시인 / 나의 가난함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천상병 시인 / 난 어린애가 좋다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 제1부. 좋다 좋다 다좋다! 중(中)

 

 


 

 

천상병 시인 / 낚시꾼

 

 

일심으로 찌를 본다.

열심히 보는 찌는 꽃과 같다.

언제 나비처럼 고기가 올까?

 

조용하디조용한 강가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나는 정신의 호흡을 쉴 줄 모른다.

 

드디어 찌가 움찍하더니

나는 고기 한 마리의 왕

승리한 양 나는 경치를 본다.

 

 


 

 

천상병 시인 / 내 방(房)

 

 

내 방은

녹색(綠色)장관이다.

책이 한 3백50권되고

또 벽(壁)에 붙인

사진과 그림들이다.

 

녹색(綠色)은 눈에 참 좋다.

그래서 내눈도 참 좋다.

 

내 방은 작지만

그래도 넓어 보이니 어쩌랴?

 

나는 내 방을 사랑하고

방 또한 날 사랑해 준다.

 

- 제1부. 좋다 좋다 다좋다! 중(中)

 

 


 

 

천상병 시인 / 내일의 노래

 

 

어지럽고 어두운 오늘

우리는 그리운다 내일을......

어서 오너라 내일이여 훤히 트이게......

 

그 내일은 우리들의 것이다.

막지 말아다오.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스스러움없이

우리는 내일로 간다.

맞이해다오 우리들의 환한 모습을......

 

-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중(中)

 

 


 

 

천상병 시인 / 너무나도 점잖으신 의사님께

- 입원생활 가운데서

 

 

필자가 88년도 5월 17일 퇴원한 그 일주일 전날쯤에 매일 아침 열시 무렵에 회진오시던 구내과 과장님이 두간호원과 함께 또 오셔가지고는 필자의 만삭이던 복부를 이리저리 진단하시면서

 

"일주일만 있으면 깨끗하게 퇴원되겠습니다"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안심해야 할 필자가 되려 과장님의 소매를 붙잡으며 애걸했습니다.

"과장님 그런데 이 배꼽 좀 봐 주세요. 왜 이리 일 센치쯤 배 위에 올라와 있는지, 큰 걱정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그 배꼽도 차차 배속으로 가라 앉아서, 가라앉은 정도가 아니고 드디어는 침대 밑으로까지 빠질 겁니다!"

하시지 않겠어요!

 

- 제3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중(中)

 

 


 

 

천상병 시인 / 노도(怒濤)

 

 

황풍(荒風)아래 제철이 한창이다.

굳센 공간상(空間相)이지만은

그래도 일말의 서정미(抒情味)를 풍기는 것은 물이다.

 

직선형광경(直線形光景)에 저항(抵抗)하는 것은

약하디 약하고 형편없이 무력하기만 한

액체집단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소금은 대지(大地)의 소금이라지

그래도 물속에 있어야만 현상유지다.

바람아 더욱 불어라. 그래야 일요일이다.

 

- 제5부. 내 영혼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때 중(中)

 

 


 

 

천상병 시인 / 노래

 

 

나는 아침 다섯 시가 되면

산으로 간다

서울 북부인 이 고장은

지극한 변두리다

산이 아니라

계곡이라고 해야겠다

자연스레 노래를 부른다

 

내같이 노래를 못 부르는 내가

목청껏 목을 뽑는다

바위들도 그 묵직한 바위들도

춤을 추는 양하고

산등성이가 몸을 움직이는 양하고

새소리들도 내게 음악을 주고

나무들도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노래한다 나는 노래한다.

 

- 이 세상 소풍 중(中)

 

 


 

 

천상병 시인 / 눈(眼)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 부른다

그러나 눈의 용도는

사람이 무엇을 보기 위한 거다

그러나 무엇을 보기 위한 것이

보여지는 창이라고 하니 용도도 많다.

 

꽃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있는 꽃을 눈 안으로 옮기는 거다

무엇이 눈 안으로 운반하는가?

그것은 마음의 힘이다.

그러니 정신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창'은 두 개가 있으니

두 개 다 활짝 열고

이 세상의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는 것은 모조리 말이다

그리하여 눈은 태양처럼 빛나고

온 세상의 창이 되어야 한다.

 

- 이 세상 소풍 중(中)

 

 


 

천상병 [千祥炳, 1930.1.29 ~ 1993.4.28] 시인

1930년 일본 효고현(兵庫県)에서 출생.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신  담임교사이던 시인 김춘수의 주선으로 시 〈강물〉이 《문예》誌에 초회 추천. 1951년 《문예》誌에  평론  〈나는  부하고 저항 할 것이다〉를 발표하며 평론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주막에서』(민음사, 1979)와  『요놈! 요놈! 요 이쁜 놈!』(답게, 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 민음사) 등이 있음. 1993년 숙환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