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 / 독자들에게
내 독자들은 꽤 많다.
초상화를 보내오는 독자도 있고 선물을 보내오는 독자도 있다.
전화 걸어오는 독자는 너무 많다.
이런 독자들에게 보답할려고
나는 좋은 시(詩)를 끊임없이 써야 하리라!
- 제1부. 좋다 좋다 다좋다! 중(中)
천상병 시인 / 동네
나 사는 곳 도봉구 상계1동 서울의 최북방이고 변두리의 변두리.
수락산과 도봉산 양편에 우뚝 솟고 공기 맑고 청명하고 산 위 계곡은 깨끗하기 짝없다.
통틀어 조촐하고 다방 하나 술집 몇 개 이발소와 잡화점 이 동네 그저 태평성대.
여긴 서울의 별천지 말하자면 시골 풍경 사람들은 다 순박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향토(鄕土) 아끼다.
- 사는 데로 살다가 중(中)
천상병 시인 / 들국화
84년 10월에 들어서 아내가 들국화를 꽃꽂이했다. 참으로 방이 환해졌다 하얀 들국화도 있고 보라색 들국화도 있고 분홍색 들국화도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 방은 향기도 은은하고 화려한 기색이 돈다 왜 이렇게도 좋은가 자연의 오묘함이 찾아들었으니 나는 일심(一心)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 이 세상 소풍 중(中)
천상병 시인 / 땅
나도 땅을 가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민병하 선생님도 수원 근처에 오천 평이나 가졌는데......
싼 땅이라도 좋으니 한 평이라도 땅을 가지고 싶다. 땅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좋으랴......
땅을 가지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
천상병 시인 / 마음의 날개
내 육신(六身)에는 날개가 없어도 내 마음에는 날개가 있다. 세계 어디 안가본 데가 없다. 텔레비전은 마음 여행의 길잡이가 되고 상상력(想像力)이 길을 인도한다. 북극(北極)에도 가 보고 남양(南洋)의 오지(奧地)에도 가보았다. 하여튼 내가 안 가본 곳이란 없다. 내 마음엔 날개가 있으니까.
- 제1부. 좋다 좋다 다좋다! 중(中)
천상병 시인 / 막걸리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천상병 시인 / 매화꽃
뜰에 매화꽃이 탐스럽게 피었다. 옛날의 시인들이 매화꽃 시를 많이 읊었으니 나도 한 편 쓸까 합니다.
하얀 꽃송이가 하도 매력이 있어 보기만 하여서는 안 되겠기에 매화꽃과 친구가 되고 싶구나! 친구보다 내 마누라로 삼고 싶구나!
지금은 92년 4월 30일인데 봄을 매화꽃 혼자서 만끽하고 있는가 싶구나!
한들한들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천사와도 같구나! 오래 꽃피어서 나를 달래다오!
천상병 시인 / 맥주(麥酒) 두병주의
나는 오전 11시에 맥주 한병 마시고 오후 5시에 또 한병 마신다. 이렇게 마시니 참 몸에 좋다.
한병씩 마시니 음료수나 다름이 없다. 많이 마시면 병에 걸린다는걸 나는 너무도 잘 안다.
입원까지 하지 않았는가!
나는 앞으로 이 주의(主義)를 지켜 나갈 것이다.
- 제2부. 젊을을 다오! 중(中)
천상병 시인 / 먼 산
먼 산은 나이 많은 영감님 같다 그 뒤는 하늘이고 슬기로운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이고 통일이 없지만 하늘의 이치를 알게 되면 달라지리라고 - 먼 산은 애오라지 역사의 거물 우리 인간은 그 침묵에서 배워야 하리......
- 이 세상 소풍 중(中)
천상병 시인 / 무명(無名)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저녁놀이 져가는 것이었다.
그 시간과 밤을 보면서 나는 그때 내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봄도 가고 어제도 오늘 이 순간도 빨가니 타서 아, 스러지는 놀빛
저기 저 하늘을 깎아서 하루빨리 내가 나의 무명(無名)을 적어야 할 까닭을
나는 알려고 한다. 나는 알려고 한다.
-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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