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 / 나무
누가 심었더란 말인가.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도 나무는 있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누가 심었더란 말이냐?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다만 하느님이 심으셨다는 생각이 굳어갈 뿐이다. 보살피는 것도 하느님이다.
천상병 시인 / 나의 가난함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천상병 시인 / 난 어린애가 좋다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 제1부. 좋다 좋다 다좋다! 중(中)
천상병 시인 / 낚시꾼
일심으로 찌를 본다. 열심히 보는 찌는 꽃과 같다. 언제 나비처럼 고기가 올까?
조용하디조용한 강가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나는 정신의 호흡을 쉴 줄 모른다.
드디어 찌가 움찍하더니 나는 고기 한 마리의 왕 승리한 양 나는 경치를 본다.
천상병 시인 / 내 방(房)
내 방은 녹색(綠色)장관이다. 책이 한 3백50권되고 또 벽(壁)에 붙인 사진과 그림들이다.
녹색(綠色)은 눈에 참 좋다. 그래서 내눈도 참 좋다.
내 방은 작지만 그래도 넓어 보이니 어쩌랴?
나는 내 방을 사랑하고 방 또한 날 사랑해 준다.
- 제1부. 좋다 좋다 다좋다! 중(中)
천상병 시인 / 내일의 노래
어지럽고 어두운 오늘 우리는 그리운다 내일을...... 어서 오너라 내일이여 훤히 트이게......
그 내일은 우리들의 것이다. 막지 말아다오.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스스러움없이 우리는 내일로 간다. 맞이해다오 우리들의 환한 모습을......
-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중(中)
천상병 시인 / 너무나도 점잖으신 의사님께 - 입원생활 가운데서
필자가 88년도 5월 17일 퇴원한 그 일주일 전날쯤에 매일 아침 열시 무렵에 회진오시던 구내과 과장님이 두간호원과 함께 또 오셔가지고는 필자의 만삭이던 복부를 이리저리 진단하시면서
"일주일만 있으면 깨끗하게 퇴원되겠습니다" 하시는 거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안심해야 할 필자가 되려 과장님의 소매를 붙잡으며 애걸했습니다. "과장님 그런데 이 배꼽 좀 봐 주세요. 왜 이리 일 센치쯤 배 위에 올라와 있는지, 큰 걱정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그 배꼽도 차차 배속으로 가라 앉아서, 가라앉은 정도가 아니고 드디어는 침대 밑으로까지 빠질 겁니다!" 하시지 않겠어요!
- 제3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중(中)
천상병 시인 / 노도(怒濤)
황풍(荒風)아래 제철이 한창이다. 굳센 공간상(空間相)이지만은 그래도 일말의 서정미(抒情味)를 풍기는 것은 물이다.
직선형광경(直線形光景)에 저항(抵抗)하는 것은 약하디 약하고 형편없이 무력하기만 한 액체집단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소금은 대지(大地)의 소금이라지 그래도 물속에 있어야만 현상유지다. 바람아 더욱 불어라. 그래야 일요일이다.
- 제5부. 내 영혼의 빈터에 햇살이 퍼질때 중(中)
천상병 시인 / 노래
나는 아침 다섯 시가 되면 산으로 간다 서울 북부인 이 고장은 지극한 변두리다 산이 아니라 계곡이라고 해야겠다 자연스레 노래를 부른다
내같이 노래를 못 부르는 내가 목청껏 목을 뽑는다 바위들도 그 묵직한 바위들도 춤을 추는 양하고 산등성이가 몸을 움직이는 양하고 새소리들도 내게 음악을 주고 나무들도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노래한다 나는 노래한다.
- 이 세상 소풍 중(中)
천상병 시인 / 눈(眼)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 부른다 그러나 눈의 용도는 사람이 무엇을 보기 위한 거다 그러나 무엇을 보기 위한 것이 보여지는 창이라고 하니 용도도 많다.
꽃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있는 꽃을 눈 안으로 옮기는 거다 무엇이 눈 안으로 운반하는가? 그것은 마음의 힘이다. 그러니 정신의 결정(結晶)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창'은 두 개가 있으니 두 개 다 활짝 열고 이 세상의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는 것은 모조리 말이다 그리하여 눈은 태양처럼 빛나고 온 세상의 창이 되어야 한다.
- 이 세상 소풍 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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