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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조향 시인 / 장미와 수녀의 오브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28.

조향 시인 / 장미와 수녀의 오브제

 

 

  하얀 아라베스크 짓궂게 기어간 황혼

  낙막(落寞)이 완성된 꽃밭엔

  수 많은 수녀의 오브제.

  인생이라는. 그럼.

  어둠침침한 골목길에서

  잠간 스치며 지나보는 너를…….

 

  영구차가 전복한 거리거리마다에서

  비둘기들은 검은 까운을 휘감고

  푸른 별이 그립다.

 

  내가 서 있는 소용도는 상황에

  짙은 세피어의 바람이 분다.

  까맣게 너는 서 있다.

 

  네가 사뿐 놓고 간 검은 장미꽃.

  내 이단(異端)의 자치령에

  다시 꽃의 이교(異敎)를 떨어뜨려 놓고.

  들국화 빛으로 하늘만 멀다.

 

  taklamakannakamalkata

  사막의 언덕엔 갈대꽃

  갈대꽃밭 위엔 파아란

  이상(李箱)의

  달.

 

  달밤이면

  청우(靑牛) 타고 아라비아로 가는

  노자(老子).

 

  꽃잎으로 첩첩 포개인

  우리 기억의 주름 주름 그늘에서

  먼 훗날 다시 서로의

  이름일랑 불러 볼 것인가!

 

  패배의 훈장을 달고

  예상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하면…….

 

  포르말린 냄새만 자꾸 풍기는

  새까만 지구 위에서

  어린애들의 함잉 소리만 나고‥….

  메아리도 없이 하 심심해서

  나는 요오요오나 이렇게 하고 있다.

 

월간 『현대문학』 1958년 12월호 발표

 

 


 

 

조향 시인 / 검은 전설

 

 

하얀 종이 조각처럼 밝은 너의 오전의 공백(空白)에서 내가 그즘 잠시를 놀았더니라 허겁지겁 하얀 층층계를 올라버린 다음 또아리빛 달을 너와 나는 의좋게 나눠 먹었지 옛날에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고대(古代)의 원주(圓柱)가 늘어선 여기 내 주름 잡힌 반생을 낭독하는 청승맞은 소리 밤이 까아만 비로오드의 기침을 또박또박 흘리면서 내 곁에 서 있고 진흙빛 말갈(靺鞨)의 바람이 설레는 하늘엔 전갈이 따악들 붙여 있다 참새 발자국 모양한 글자들이 마구 찍혀 있는 어느 황토 빛 영토의 변두리에서 검은 나비는 맴을 돌고 아으 다롱디리! 안타까비의 포복(匍匐)이 너의 나의 육체에 의상(衣裳)처럼 화려하구나 나는 골고다의 스산한 언덕에서 마지막 피를 흘린다 나의 손바닥에서 하얀 네가 멸형(滅形)하고 나면 물보라 치는 나의 시커먼 종점에서 앙상하게 걸려 있는 세월의 갈비뼈 사이로 레테의 강물이 흐른다 나는 검은 수선꽃을 건져 든다 쌕스폰처럼 흰 팔을 흔드는 것은 누굴까! 팔목에 까만 시계줄이 감겨 있다 인공위성 이야길 주고 받으면서 으슥한 골목길로 피해 가는 소년들의 뒤를 밟아 가니까 볼이 옴폭 파인 아낙네들이 누더기처럼 웃고 섰다 병든 풍금이 언제나 목쉰 소리로 오후의 교정을 괴롭히던 국민학교가 서 있는 마을에 아침마다 파아란 우유차를 끌고 오던 늙은이는 지금은 없다 바알간 석양 비스듬히 십자가 교회당 하얀 꼬리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바람결에 항가리아 소녀 탱크에 깔려 간 소녀들의 프란네르 치맛자락이 명멸한다 소롯한 것이 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 내 어두운 마음의 갤러리에 불을 밝히러 너는 온다 지도를 펴 놓고 이 논샤란스의 지구의 레이아웃(layout)를 가만히 생각해 보자 내일이면 늦으리 눈이 자꾸 쌓인다.

 

<자유문학, 1958. 12>

 

 


 

 

조향 시인 / 에피소드(Episode)

 

 

열오른 눈초리, 하잖은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물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보았다.

 

― 아이 !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처박곤 하얗게

化石이 되어갔다.

 

 


 

 

조향 시인 / ESQUISSE

 

 

1

눈을 감으며.

SUNA는 내 손을 찾는다.

손을 사뿐 포개어 본다.

따스한 것이.

- 그저 그런 거에요!

- 뭐가?

- 세상이.

SUNA의 이마가 하아얗다. 넓다.

 

2

SUNA의

눈망울엔.

내 잃어버린 호수가 있다.

백조가 한 마리.

내 그 날의 산맥을 넘는다.

 

3

가느다랗게.

스물다섯 살이 한숨을 한다.

- 또 나일 한 살 더 먹었어요!

SUNA는 다시 눈을 감고.

- 그저 그런 거에요!

아미에 하냥 수심이 어린다.

 

4

- 속치마 바람인데......

- 돌아서 줄까?

- 응!

유리창 너머 찬 하늘이 내 이마에 차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됐어요.

 

5

SUNA가 화장을 한다.

- 화장도 예술 아녜요?

SUNA의 어깨 넘어로 내 얼굴이 쏘옥 돋아난다.

나란히 나와 SUNA의 얼굴이. 거울 안에서.

- 꼭 아버지와 딸 같아요.

 

6

SUNA의 하얀 모가지에 목걸이.

목걸이에 예쁜 노란 열쇠가 달려 있다.

- 이걸로 당신의 비밀을 열어 보겠어요.

 

7

STEFANO의 목청에 취하면서.

눈으로 SUNA를 만져 본다. 오랫 동안.

- 왜 그렇게 빤히 쳐다 보세요?

- 이뻐서.

- 그저 그런 거에요!

 

8

나의 SUNA와 헤어진다.

까아만 밤,거리.

택시

 프론트 그라스에 마구 달겨드는.

진눈깨비 같은 나비떼 같은.

내 허망의 쪼각 쪽각들.

앙가슴에 마구 받아 안으며.

SUNA의 눈망울이.

검은 하늘에 참은 많이 박혀 있다.

깜박인다.

 "그저 그런 거에요"

 

 


 

조향(趙鄕 1917.12.9~1985.7.12)

1917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본명은 섭제(燮濟). 시인 봉제(鳳濟)가 그의 동생. 진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初夜〉가 당선되어 등단. 1941년 일본대학 상경과 중퇴. 8·15해방 후 마산상업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노만파 魯漫派〉를 주재. 이어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가이거 Geiger〉·〈일요문학〉 등을 주재. 모더니즘 시를 내세웠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

1953년 국어국문학회 상임위원과 현대문학연구회 회장, 1974년 한국초현실주의 연구회 회장 역임. Sara de Espera〉(문화세계, 1953. 8)·〈녹색의 지층〉(자유문학, 1956. 5)·〈검은 신화〉(문학예술, 1956. 12)·〈바다의 층계〉(신문예, 1958. 10)·〈장미와 수녀의 오브제〉(현대문학, 1958. 12) 등을 발표. 특히 〈바다의 층계〉는 낯설고 이질적인 사물들을 통해 바다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읊은 작품. 평론으로 〈시의 감각성〉(문학, 1950. 6)·〈20세기의 문예사조〉(사상, 1952. 8~12)·〈DADA 운동의 회고〉(신호문학, 1958. 5) 등을 발표. 저서로는 『현대국문학수 現代國文學粹』·『고전문학수 古典文學粹』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