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 /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 시인 / 사령(死靈)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김수영 시인 / 六法全書와 革命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 불쌍한 백성들아 불쌍한 것은 그대들뿐이다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는 그대들뿐이다 최소한도로 자유당이 감행한 정도의 불법을 혁명정부가 구육법전서를 떠나서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한 혁명을--- 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 그놈들이 배불리먹고 있을 때도 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 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 그대들인데 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고 있다 보라 항간에 금값이 오르고 있는 것을 그놈들은 털끝만치도 다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다 보라 금값이 갑자기 8,900환이다 달걀값은 여전히 영하 28환인데
이래도 그대들은 유구한 공서양속정신으로 위정자가 다 잘해줄 줄 알고만 있다 순진한 학생들 점잖은 학자님들 체면을 세우는 문인들 너무나 투쟁적인 신문들의 보좌를 받고 아아 새까맣게 손때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 나의 손등에 장을 지져라 4.26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허기야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신문하고 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 쓰는 말밖에는 아니되지만 그보다도 창자에 더 메마른 저들은 더이상 속이지 말아라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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