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 시인 / 참새
물명고(物名考)에 따르면 늙어서 무늬가 있는 참새를 마작(麻雀)이라 한다지. 참새들은 이야기의 산산조각을 물고 오곤 한다. 깨진 무늬를 들고 얼굴을 비춰보는 시간.
무늬도 늙어 이야기가 다 끝나가는 저녁. 공원 평상에 둘러앉은 귀신들 마작을 한다. 시간은 패를 돌리다가 끝내 자신의 얼굴을 뭉개고 사라져 버린다. 한 마디 변명도 없이. 사과도 없이. 본질은 어디가고 뒷담화만 남아 진실을 찾겠다고 아우성이냐. 가까운 사람은 치욕적으로 가깝고, 먼 사람은 애초에 다가온 적 없으니 아름답지 않았나. 모르는 집 마당에 죽은 목련나무를 보러 갔었던 어느 저녁의 일처럼 서러워진다.
작년 2월에 죽은 목련입니다. 작은 꽃망울이 그대로 있군요. 가지를 꺾어봤어요. 분명 죽었습니다. 내년에 흰 페인트를 칠해버릴 겁니다. 그 집을 나와 공원에 앉아 울었다. 낯선 집 이층에 당신이 살고 있다는 걸 안 이후, 죽은 목련나무를 되살리는 꿈을 꿨다.
목련나무를 팔라고 하면 어떨까. 뿌리라도 파보면 어떨까. 꽃망울은 입술을 다문 채 울음 삼키고 있다. 사랑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 본 게 언제였더라. 이봐요. 골치 아픈 건 질색이라. 그냥 패나 돌려요. 우연도 이런 기막힌 우연이. 당신을 이런 천국에서 만나다니. 누가 고통을 주고 달아난 건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아무튼 이곳에서 만나니 반가워요. 그러니 패나 돌립시다. 애틋한 밤이 오기 전에.
작은 새들이 공기의 대륙으로 날아가는 걸 보고 싶어. 또 쓸데없는 소리를. 그냥 밥이나 먹고 놀다가 흩어지면 될 것을. 이미 사랑스러워진 고독도 내 등을 파고 들어가 혼자 울곤 한다. 기어코 심장을 뚫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 울음에도 무늬가 남을까. 살짝 비치는 거 말이야. 다 지나고 나면.
월간 『현대시』 2015년 9월호 발표
박서영 시인 / 미행
버스정류소에 앉아 목련꽃 떨어지는 거 본다 정확한 노선을 따라가는 세월 보려고
정류소를 향해 가는 당신의 뒤를 미행한 적 있다 당신은 다리 위에 멈춰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검은 입 안을 보여주었다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가던 걸음 딱 멈추고 뜨거운 입천장을 보여주는 슬픔
어쩌다 목련꽃 피는 밤에 우린 마주쳤을까 피려고 여기까지 온 목련은 지고 버스는 덜렁덜렁 떨어진 목련꽃송이 태우고 간다 나는 하나 둘 셋 세월을 세다가 그만 둔다 넷 다섯 여섯 방향을 세다가 그만 둔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목련꽃송이들이 툴툴거리며 버스를 타고 어딘가 가고 있다 일곱 여덟 나는 떠나는 이들의 뒤통수를 세다가 그만 둔다 자꾸 흔들리고 자꾸 일렁거리는 것들은 자신들이 지독히 슬픈 세계라는 걸 알고 있을까
내 손을 뿌리치며 가는 당신을 따라간 적 있다 당신은 도망가다가 갑자기 길 위의 늙은 구두수선공 앞에서 밑창 떨어진 구두를 벗어 수선을 맡겼다 가던 걸음 딱 멈추고 뜨거운 맨살을 보여주던 구두 나는 당신 곁에 서서 행방이 묘연해진 기억들을 떠올렸다 사라지고 싶은 표정으로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랑이 수선되고 있다
여기저기 꿰매고 기워져서 행복도 불행도 아닌 이상한 이야기들이 헝겊인형처럼 되살아나고 있다 입김으로 체온을 불어넣고 얼룩과 무늬를 그려 넣고 음과 양의 감정까지
통증을 알아버린 인형이 목련나무 아래 버려져 있다 당신을 생각하면 힘들고 슬퍼요, 나무 뒤에 숨은 복화술사의 목소리가 휘파람 같다
정확한 버스노선을 따라가는 당신 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꽃송이들, 눈송이들, 흰 주먹들이 떨어진다 어떻게 녹아내려야 하고 멈춰야 하고 사라져야 하는가
어떻게 이별하고 잊어야 하고 퇴장해야 하는지 계속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다
월간 『현대시학』 2017년 6월호 발표
박서영 시인 / 죽음의 강습소
오전 여덟시 상가를 지나친다 동네 입구의 전봇대에는 하얀 종이에 반듯하게 씌어진 喪家→가 붙어 있다 이 길로 가면 상가로 갈 수 있다 나는 지금 문상 가는 중이 아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이 표식을 따라왔다 울면서도 왔고 졸면서도 왔다 사랑하면서도 왔고 아프면서도 왔다 와보니 또 가야하고 하염없이 가야하고 문상 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문상 간다 죽어서도 계속 되는 삶이 무덤 속에 누워 꺼억꺼억 운다 울다가 가만히 죽은 듯 누워있는 시체들 여자들은 죽음의 강습소에서 과도를 꺼낸다 여자들이 흘리는 눈물을 따먹으며 세월이 간다 동그란 눈물에 과도를 꽂는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과즙의 맛을 지닌 눈물 죽음의 강습소 같은 죽음의 예배당 같은 이 도시의 하늘이 뻥 뚫려 있구나 허공에 흩어진 시간의 표식을 따라가던 어떤 날은 가령 오늘 같은 오전 여덟시 도시는 영정사진처럼 검은 띠를 두르고 묘비 같은 십자가를 바짝 세우고 있다 그 아래 납작 엎드린 채 살아간다 그런데 무엇이 내 몸을 자꾸 찌르는 거야 나를 들어올리는 거야 묵직한 棺 하나가 내려오는 아파트를 나는 그냥 지나친다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 시작,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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