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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분 시인 / 사나사
舍那寺 경내에서 푸른 열매 줍기 전, 이미 봄의 광선에 찍혔을 심장 빛에 노출된 필름처럼 아득했을라
그건 개살구라서 못먹어요
승복 밖으로 비어지는 단단한 등허리 다붓하게 한마디를 던지고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층계 세월의 양감 고스란히 지니고 하얀 햇살과 조우하는 오전
잠깐의 스침에서 생겨났을 은박지에 붉은 꽃잎, 고운 풀잎 물들여서 남회귀선 따라 자라는 카카오나무 열매 마법사 고깔 모자마냥 포장한, 키스
이거 드려도 되나요
쓸모없을 헤아림이 듬뿍한 물색없는 물음과 알록달록한 초콜릿 받던 손에는 어느새 이슬 백합 한 송이 들려있고 길게 잘라 준 줄기를 그대로 속세간에 담그니 봉오리 마저, 벙그네
정재분 시인 / 봄의 遠近
하얀 배꽃이 별처럼 총총한 과수원을 지나 고갯마루에 서니 앞산 중턱에 돌아앉은, 유리창 가득한 집으로 두 남자가 천천히 들어간다 빨랐던 걸음도 느려지게 하는 그곳은 카페가 아니다 유리창 가득한 옆으로 녹슨 페치카가 있을 테고 장작더미 위로 거미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역을 넓히고 있을 것이다
숨쉬기를 버거워 하는 누군가 마당가 화사한 살구꽃을 그림자처럼 올려다볼 것이다 겨우내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어둠을 태우는 촛불을 깊은 기침으로 지켜내며 어느새 한 편의 詩를 닮아버린 生을 찾아 나선 휴일, 그들은 시집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다만 나의 비등점은 섭씨 삼십육 점 오, 우정 하나는 길러 낼 체온, 그러나 멀찌막이 서서 바라보는 봄
정재분 시인 / 왈츠로 인사하기
안아주는 인사가 좋아 보여 무심하게 해변처럼
젖기도 하고 마르기도 하는
은빛 모래 반짝이는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줘
파도가 멈춘 곳, 모래톱에 새겨놓은 언어를 읽으며, 문득
바다가 사랑 같아 나도 모르게 뒷걸음친다 해도
웅크린 시간에 떠밀려 발목 담그고 말하게 될 거야
너의 아름다움을 견디겠다고
정재분 시인 / 박물관으로 간 검객
1.
몽촌토성역 5번 출구에 꽁지머리를 한 남자가 있다 땟국물에 찌든 가죽쟈켓을 여름의 지척에서도 벗지 않는다 언제나 하염없이 앉아 있을 뿐 구걸을 모르더니 어디 갔을까 삶의 줄을 놓아버리고 풍경이 된 남자, 오늘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몇 날 며칠째 내린 비에 휩쓸려 갔나
2.
중미산 자락엔 숱 많은 머리카락을 동인 꽁지머리 남자가 산다 살아있는 건 왼손과 눈빛 나머지 지체를 시나브로 죽이고 있다 날아가는 나비 날개 끄트머리 베어 낼 적에 때를 모르는 오래 앓는 기침 잠잠하여 검객의 거처는 박물관이 된다 그곳엔 전설의 진검과 왼손, 살갗위로 선연한 핏줄과 뼈가 있고 고조선의 숨결 천부경 몇 권과 과거에 붙들린 警氣하는 현실이 전시되어 있다 사명이 사라진 후 언제나 보수 중인 郞家의 芽城, 어둠이 물드는 산그림자 스미고 존재의 무거움에 나날이 투명해 가고 가늠할 겨를 없이 그의 먼 시선 따라가던 사람들 길을 찾는가! 눈꺼풀을 끔벅이다 여윈 남자의 등을 떠민다 신이나 되라고
정재분 시인 / 汽笛소리
더위를 헹구고 젖은 귀를 말리던 주포계곡 바윗돌 구비구비 흐르는 은하수 물빛 가로지른 철로 위를 아스라이 가던 청년, 당신은 허공을 걸어가는 바람 여섯 살 계집아이 애간장 녹이던 소리 앞세우고 달려오는 기차 어떤 열망에 목청이 터지면 도깨비방망이 튀어나오고 의연히 살아나서 다시 건너던 무성영화 같은 童話 뒤적이던 책갈피에서 뚝, 떨어지는 마른 잎
2005년 《시안》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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