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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영혜 시인 / 사냥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9.

이영혜 시인 / 사냥꾼

 

 

  나는 초원의 사냥꾼

  하루 종일 발톱 세우고 있는 암사자다

  얼룩말이나 살집 좋은 들소라면 좋겠지만

  줄 지어 강을 건너는 누떼 새끼도

  다리 가는 톰슨가젤도 사냥감이다

  포획의 황홀한 순간을 난 언제나 꿈꾼다

  뜨거운 심장이 펄떡이는 오브제가 필요하다

  내 우리엔 배고픈 뭇 새끼들

  난 오늘도 허기진 사냥꾼이다

  마른 풀 밟고 오는 바람의 발자국에도

  귓바퀴 쫑긋 서고

  핏발 선 동공은 언제나 열려 있다

  목덜미를 틀어잡을 한 순간을 기다리며

  털가죽 아래 근육과 힘줄은

  활시위처럼 팽팽히 당겨져 있다

  어서들 움직여 봐!

  달콤한 피 냄새를 풍겨보라고!

  주린 뱃속 가득한 나의 살기가

  벼랑 끝에서 헐떡이는 네 숨통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단숨에 꽂을 테니까

 

 


 

 

이영혜 시인 / 일몰

 

 

  하루를 끌고 온 불새가

  수평선 시퍼런 단두대의 날에

  모가지를 올려놓고 있다

 

  두 눈 끔벅이며

  도려진 제 살을 견디던

  접시 위 도미 한 마리

  살점 비워지자

  가시에 남은 미련을

  푸르르 경련하며 떨어낸다

  잔뜩 부풀린 아가미로

  마지막 한숨이 빠져 나오고

  이내 고요하다

 

  철커덕 칼날이 떨어지자

  핏물 번진다

  목을 타고 넘어오는 오늘

  검은 도포자락을 끌며

  수평선 너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사자의 발자국 소리

 

  바다 위에 흩어져 반짝이는

  불새의 깃털 위로

  검은 관 뚜껑 천천히 덮인다

 

 


 

 

이영혜 시인 / 말채나무

 

 

  꽃도 이파리도 이름도 다 벗은

  맨 가지 에돌아간 길

  불거진 발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씰룩이는 입술 사이에 붓을 물고

  한 획 두 획 그린

  수묵화 한 폭

  봄 하늘에 걸려 있다

 

  뜻 한번 꺾어질 때마다

  옹이진 관절, 휘젓듯 허공을 끌어안으며

  비틀린 팔로 그려낸 그림이다

  이 악물고 열병을 참아내던 입술처럼

  등걸은 새카맣게 갈라 터져 있다

  가지의 회오리치는 몸부림을 붙잡느라

  발등에는 힘줄이 솟구쳐 있다

 

  계룡산 갑사 가는 길

  말채나무 한 그루

  뇌성마비 구족화가의 사지처럼

  뒤틀린 알몸, 봄물 가득 오르고 있다

  배배 꼬인 가지

  먼 하늘 가리키며

  어서 가라, 느린 발걸음 채찍질하고 있다

 

 


 

 

이영혜 시인 / 24시 김밥천국

 

 

  앞치마도 풀지 않은 아낙이

  TV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밥의 천국을 지키고 있다

  심야의 허기들이 문을 밀고 들어오면

  하품을 얼른 거두고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지루하게 식어가는 시간들

  김발에 꼭꼭 말아 가지런히 썰어낸다

  한 사발 추위 펄펄 끓여 담아낸다

  얼어붙은 새벽 2시

  유리창을 빼곡하게 채운

  메뉴들의 행간을 비집고

  얼굴 검은 異國의 남자 둘

  언 손을 비비며 들어간다

  성에 뿌연 창 안에

  뜨거운 밥의 詩 한 상 차려진다

  먼 나라의 어머니들이 보내온

  안남미 밥풀 같은 싸라기 눈발

  창가를 기웃대다 떨어져 흩어진다

 

 


 

 

이영혜 시인 / 쇠똥구리

 

 

  봉분 같은 폐지더미

  뒤뚱거리며 차도를 가고 있다

  거기 리어카 손잡이에

  왜소한 노인이 매달려 가고 있다

  덜컹,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휘청, 땅으로 내려오는

  곡예를 하며 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의 위태로운 波形

  어디쯤일까 손잡이 위로

  도약하며 하늘을 쳤던 시절!

  있기는 있었을까

 

  제 몸보다 큰 짐 부지런히 밀고 가는

  염천의 쇠똥구리

  버겁게 굴려온 삶이

  바닥으로 가라앉자

  갈라터진 두 발바닥이

  또다시 번쩍 들리며

  달구어진 허공에 낙인을 찍는다

 

2008년《불교문예》 등단시

 

 


 

이영혜 시인

서울대 치과대학 및  치과대학원 졸업. 치의학박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2008년《불교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천년의시작, 2014)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