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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 시인 / 초콜릿 상자를 들고 가는 춘자의 너무 느린 나선형
어느 날 오후
초콜릿상자를 들고 가던 춘자는 시장모퉁이를 돌자마자 그 자리에서 꿈을 꾸기 시작한다:
안락의자에 깊숙이 웅크린 노파, 잘 익은 생선처럼 웃으며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는데 고양이는 얼굴이 반쯤 잘렸고 은회색의 느린 표정을 지었다
그날 저녁
춘자는 섬세하게 살을 발라내며 생선을 먹는다
익은 눈깔이, 부드럽게 춘자를 바라볼 때마다 커튼이 슬그머니 열리고
(뼈만 남은 생선처럼)
누군가 춘자의 살을 발라낸다
*
흰 바탕 위에 흰 사각형*은 냄새가 해체된 자국
뼈와 살을 발라내는 여자는 말이 없다 꾸역꾸역 식사를 하는 동안
저녁의 안락의자는 앞뒤로 흔들린다 구역질나도록 끈질기게
구역질나도록 느리게
*
또 다른 어느 날,
춘자는 시장을 걷다가 나무상자에 쌓인 사과 덩어리들이 자신을 노려본다는 기분이 든다
순간 발가벗겨지는 춘자의
새빨간 눈을 뜬 너무 느린 나선형
*
시장모퉁이에서 안락의자를 흔드는 춘자는
혼자 조용히 멀리 본다 황폐한 북쪽 해안과 사막의 접경까지 갔다 왔지만
죽은 고양이는 얼굴이 반쯤 잘린 채 여전히 안락의자를 흔들고 있다
초콜릿상자를 들고 오던 춘자,
희미하게 웃으며 멈춰 선다
*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1918년에 그린 추상화. 흰 바탕에 흰 사각형이 비스듬히 걸려 있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7년 봄호 발표
박성현 시인 / 나쁜 쪽으로
야근이 끝났지만 아직도 무언가를 해야 하는 춘자가 복도를 걷는다 얼굴의 반이 복도에 잘린 채 끝없이 이어지고 되돌아오며 다시 사라지는 검정을 따라 춘자는,
밤에서 낮까지 복도를 걷는다 버려진 이면지 같은, 어둠의 모호한 영역—복도가 없는 쪽으로 아예 복도가 없는 쪽으로 복도에 반이 잘린 채 춘자는 밤에서 낮까지 길고 무서운 공백에 방치된다 악몽의
더 깊은 악몽, 의 가장 나쁜 밤에서 낮까지 춘자의 걸음은 조금씩 뒤틀린다 발목과 무릎이 복도 속으로 사라지고 얼굴의 반이 잘린 무인카메라는 점점 더 깊어진다
아주 밝은 검정이 춘자의 얼굴에 달라붙는다
계간 『시작』 2016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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