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중일 시인 / 일어서다, 그리고 가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11. 29.

김중일 시인 / 일어서다, 그리고 가다

 

 

  존재하나 만질 수는 없다. 지상의 누구든 어디든 닿자마다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녹는 하얀 눈발이, 물고기 비늘처럼 온몸에 뒤덮인 사월의 공중을 그려본다. 사월의 모든 햇빛. 햇빛의 끝에 달린 미늘에 눈송이 하나씩 끼워지고, 땅과 바다에 드리워지고, 그걸 덥석 삼킨 물고기처럼, 마른 웅덩이 같은 방안에서 뒤척이던 사람을 생각해 본다. 온몸을 들썩이며 하늘로 끌려올라가는 사람을 안다. 사월의 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늘로 끌려올라간 유빙같은 마음들이, 바람의 모서리에 깎여 눈이 되어 내려와, 잘린 생일케이크 같은 집들 아래 식탁보처럼 깔리고, 방과 후 아이들이 둥글게 뭉치고, 넘어진 눈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자식 없이도 엄마라는 이름은 남아, 엄마는 털실뭉치같은 눈사람을 풀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기왕이면 물에도 젖지 않는 스웨터를 짜고, 산과 들과 바다에 띄우자, 맨몸의 기억이 그걸 입고 다녀오겠습니다, 등교하듯, 봄빛에 꿰어 올라가다. 누구든 어디든 닿자마다 순식간에 봄눈처럼 녹아버릴 몸이라, 한번 안아보지 못하고, 움직이면 공기처럼 흩어질까 눈 깜짝도 못하고, 눈사람처럼 얼어붙은 엄마들.   털실처럼 눈물이 줄줄 풀리는 엄마들. 점점 작아지는 엄마들.

 

  사월에는, 흐린 자궁 속인 이 세상에도

  손금도 아직 없는 작은 손처럼

  우주에서 가장 작고 하얀 발처럼

  눈발이 내리다.

  갓난아기처럼 한 줌 공중이

  눈발로 땅을 짚고 엉금엉금 품으로 기어오다.

  다음 해 사월에는 눈발로 땅을 딛고 처음 일어서다.

  그러다가 어떤 참혹도 다 통과시킬 듯한

  천진한 얼굴의 키 큰 공중으로 자라

  꽃잎보다 얇은 사월의 눈발로 땅을 디디며

  지구를 박차고, 무한대로 제 몸을 밀어 올리며

  일어서다, 그리고 가다.

 

계간 『시작』 2016년 여름호 발표

 

 


 

김중일 시인

1977년 서울에서 출생.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가문비냉장고〉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국경꽃집』(창비, 2007)과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 『내가 살아갈 사람』(창비, 2015)이 있음. 2012년 신동엽문학상, 2013년 제3회 김구용시문학상, 2016년 제9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