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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인 시인 / 소리
어허라 그저는 못 가리 담 밖에 황천극락이라 해도 그저는 못 가리 하물며 구천 깊은 명부에랴 내 짜던 날올 씨올 어찌 다 뭉텡이 뭉텡이 실타래 두고 가랴.
어허라 서천 노을밭 이랑이랑 내 삭신 다 삭아 물처럼 흘러가도 삼천 삼백 육십 개의 뼈 몽둥이들 푸른 불기둥으로 한으로 일어나 서발막대 내던지고 무덤 걸어 나오리 저 담 밖이 손짓하는 그 은한의 정토(淨土)라 한들 내 그냥은 못 가리
명분 없이 어룽지던 청동거울 한 생애 묵은 녹을 벗고 비로소 은빛 지느러미 출렁이며 감청 빛 저 바다 끝을 보기까지는 어허라 그저는 못 가리 정녕 황천극락이라 해도 그저는 내 못 가리.
-1985년 《현대시학》 초회 추천작-
김추인 시인 / 귀가
일상 만나는 골목길을 두어 번 꺾어 돌아서면 황급히 달려와 사방으로 포진하는 어둠 여기서 모든 통로는 일단 차단되고 보안등 혼자 행인을 검색한다 공복의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담배포만한 방범초소 앞을 고양이 걸음으로 급히 지나 마지막 절차처럼 마주서는 철대문의 침묵 당당한 파숫군의 완강한 어깨다 낯선 듯 낯익은 듯 희미한 외등 아래 덤덤히 떠오르는 주인의 문패 「신림 8동 567-11호 ○○○」 비밀번호 건네듯 초인종을 누르면 기척 없이 덜컥 성문은 열리고 기다린 듯 어둠이 우- 앞장을 선다 뒤따르던 하루의 끈질긴 미행자들 어둠이며 소음이며 무성한 바람의 떼 저희끼리 와글와글 현관 밖에 세워둔 채 도망치듯 황황히 문을 닫으면 비로소 아홉 평의 내 사유 공간 늦은 밤 제왕의 환궁으로 깨어나 술렁이는 따뜻한 정적이 있다. 자유의 시종들이 받쳐 든 한 그릇 라면에도 가슴 풀리는 넉넉함이여 이제 자리에 누워 그 옛날 고향 타작마당에나 찾아가 볼 일이다 오늘 남은 일은
-1985년 《현대시학》 초회 추천작-
김추인 시인 / 학춤
나는 처음 가만히 섰을 뿐 석상처럼 한사코 침묵해서 내 속에 달이 하나 걸어가고 있을 뿐 달 속에 목탁소리 극락처럼 들려와 나는 다만 절벽처럼 섰을 뿐
달빛 한 자락 귀밑으로 내려 풀잎 하나 이슬을 떨어내고 한 잎씩 두 잎씩 연꽃잎 되어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풀리어 수 천 수만의 팔이 흔들리더니 가슴이 허리가 파도의 율동으로 일렁이더니
출렁이는 몸부림 언덕을 뒤흔들어 파도는 파도를 허물고 구름은 구름으로 달려 크고 작은 연봉의 산맥으로 느껴 우는 몸 찬란한 학의 울음
나는 흔들리고 있을 뿐 달빛을 물고 일렁이는 파도 파도가 서서 벽이 되고 벽이 된 바다, 산맥으로 걸어 나와 가는 달 속에 나 섰는 것 보고 있을 뿐 나는 다만 파도의 벽으로 흔들리고 있을 뿐 흔들리다 흔들리다 벽이 될 뿐
-1985년 《현대시학》 3월호 추천 완료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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