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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왕노 시인 / 벌판으로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9.

김왕노 시인 / 벌판으로

 

 

향기로운 저 벌판으로 가자니까요.

저 들판이 넓기 때문이 아니라 저 들판을 채우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망초와 억새 질경이와 쇠비름 도꼬마리와, 땅강아지와 지렁이와 무당벌레와 개미와 귀뚜라미 방울벌레와 나비의 푸른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묻힌 내 할아버지 뼈마디 마디에서 풀꽃이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먼 사람에게 전하려다가 전하지 못한 말이 개울로 흐릅니다.

 

넓기만 하다면 망망대해이지 어디 들판이겠습니까. 벌판으로 한 발 내딛으면 나락 같은 기분일지 모르나 벌판에는 혼신으로 피워낸 꽃의 그리움이 있습니다.

노란 부리로 물고 온 파란 그리움도 있습니다.

산맥과 강을 건너온 바람의 유유자적이 있습니다.

끝물이 왔든 아니든 쭉정이든 아니든 다 자신의 의미를 가지고 벌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 들판을 말 달린다고 합시다.

말갈기가 휘날린다고 합시다, 중앙고원 같이 넓은 저 벌판, 달릴수록 끝을 감춘 저 들판에 영혼을 방생하고 싶지 않나요. 뼈를 가지런히 하고 누워 왕방울만한 별빛으로 얼굴마사지를 받고 싶지 않나요.

 

벌판은 모든 별자리의 뿌리가 있습니다. 바람의 뿌리도 있고 구름의 뿌리도 있고 새벽의 뿌리도 있습니다. 시간의 뿌리도 있고 사랑의 근원도 들판에서 싹처럼 돋아납니다.

 

벌판은 접시입니다. 사시사철을 담는 접시

눈보라도 우레도 고이 담는 접시

내가 벌판 가운데 누워 밤이슬에 젖고 싶은 것도

밤이슬이 내게 시의 영감이고 삶의 영감이고 그리움의 영감이기 때문입니다.

 

벌판은 내가 누울 자리입니다.

눈가에 흥건히 눈물 흘리며 뭇별에 부끄러워해야 할 참회의 장소입니다.

 

벌판으로 가자니까요, 주단처럼 발아래 깔린 풀도 다 재 존재감으로 빛난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벌판에는 모든 가능성이 지평선으로 이루고 푸름으로 타오르니

사랑에 굶주렸으면 들병이 같은 여자 하나 꿈꾸면서 잃어버린 호흡 법을 익히려고 꽃그늘로 아니면 달맞이꽃 곁으로

 

들판만한 넓은 가슴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 사랑이 들판으로 펼쳐져 있다는 것을 먼 들판에서 들리는 어머니 옥양목 옷자락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익히 아는 일이라

 

살다보면 구겨지고 눅눅해진 마음의 구석진 자리 왜 없을까요.

초식성 동물의 평화로운 울음이 왜 그립지 않을까요.

벌판은 무엇이나 꿈꿀 수 있는 꿈의 대제국입니다.

 

향기로운 벌판으로 가자니까요.

평생의 서러운 이야기를 앞세우고 가도 되고 소꼬리 같은 사연을 매달고 가도 되고

어떤 생이든 다 위대하고 장엄하다고 찬사를 보내는 벌판으로 한 초롱의 그리움을 태우면서 청춘을 멀리하면서 꿈의 대제국으로

 

한 줄기 달빛도 한 포기 풀도 한 마리 벌레도

제 몫의 목숨을 새파랗게 태우고 있는 벌판으로

누구든 아무나 최선으로 받아들이는 무너미를 지난 저 들판으로

들판이 우리를 필요로 하듯 우리도 들판이 우리 꿈의 모꼬지니까.

 

벌판에서 밤을 지새우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이슬에 흠뻑 젖은 고집을 부리면 위로하려고 벌판에 내리는 볶은 깨 같은 유성우에 갈채를 보내며 아픈 누군가 있다면 들판으로 데려가 치유의 시간이 꽃그늘을 밟고 올 때까지 기다리 보고 꼬이기만 하는 일이 있다면 올올이 풀러 들판으로 들판의 모든 것은 제 일인 양 모여들어 근심해 주므로

 

생명의 융단으로 촘촘히 짜진 벌판은 펼쳐지면서 내 마음 안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가장자리나 모서리가 달빛에 젖어있는 벌판

 

나 또한 벌판으로 갑니다.

육탈한 내 청춘이 홀가분하게 누워있는 들판으로

이리 저리 뒤집혀지면서 물결치는 콩 이파리를 보면서

저렇게 생도 이리 저리 뒤집으며 익혀야 한다고 배우면서

내 존재의 깃발이라도 높이 세워서 바람에 마음껏 휘날리려고

 

수직의 꿈으로 치솟았던 나무마저 묻혀 향기로운 규화목이 되어가는 벌판, 언 벌판을 드릴처럼 뚫어 봄을 철철 길어 올리는 민들레 뿌리 어둠을 갉아서 봄을 부르는 온갖 풀씨가 이웃하는 곳으로, 희망의 격전지인 그곳으로 너는 그곳에 들병이처럼 날 기다려도 좋고 난 들불처럼 네게 번져가도 좋은 날에

 

다시 가서 수렵으로 채집으로 가식의 옷가지 다 벗어버린 채 풀잎으로 앞만 가린 채 남근이 조롱처럼 흔들려도 내 꿈의 구석기 신석기가 다시 시작되는 벌판으로

 

아! 초야를 치를 때 흙벽에 들꽃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곳으로

 

웹진 『시인광장』 2017년 12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옛 영일군 동해면 일월동)에서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신춘문예출신 6인 시집)』, 『슬픔도 진화한다 』,『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말달리자 아버지(문광부 지정도서)』,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한성기 문학수상집』 『그리운 파란만장(세종도서 선정)』,『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세종도서 선정)』,『게릴라(2016년 디카시집)』, 『이별 그 후의 날들(2017년 디카시집)』등이 있음. 2003 년 제 8 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 년 제 7 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 3 회 지리산 문학상, 2016년 제 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2017년 한성기 문학상과 2017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 수상 등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5 회 수혜. 현재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현재 계간 『시와 경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