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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찬 시인 / 안나 아흐마토바를 위한 밤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9.

김영찬 시인 / 안나 아흐마토바를 위한 밤

 

 

      원스이너블루문(Once in a blue moon)의 깊은 밤.

      아주 오랜만에 그는

      달무리구름 아래 춤을 추었네.

      달빛을 배불리 먹고

      달빛을 포란

      고집 세게 부풀어 오르는 몸뚱이를 힘차게

      월훈(月暈) 속으로

      밀어 넣네.

       

      모처럼 그랬던 거였어, 달뜨는 언덕길에

      하나밖에 없는 여인숙.

      낡은 창틀에 손기타 소리는 멎고

      두꺼운 유리벽 묵직한 철대문은 그때 게으르게 열렸지.

      그리고 너는 나를 위해

      한 여인의 이름을 달밤에 불러들였어.

      그림자처럼 행방 묘연한

      한 여자.

       

      안나 아흐마토바, 그녀는 제정러시아의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생이별 상태였고

      종국엔 옛 남편이던 그가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하는

      꼴을 목격하고 말았지.

      빌어먹을 그런데 그런 불상사가 이제 와서

      내게 뭐란 말인가.

      러시아 아크메이즘에 대해서 도통 아는 바가 없는 나한테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해파리에게 남근을 쏘여 물렁뼈를 다쳤어도 눈썹 하나쯤

      흔쾌히 던져놓고 당당하게

      버틸 사람.

      시집 속의 사글세 쪽방 안에 마른 오징어처럼 오그라들다가도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야,

      창밖을 지나는 여자

      아직 인연이 닿지 않은 묘령의 한 여자를.

      강한 흡입력 입천장 안으로 빨아 당겼지

       

      창밖의 그 여자는 그런데, 세상을 한참 몰라도 되는 여인.

      여자는,

      운명이 얼마나 끈끈한 액체인가를 생각조차 않고 덜컹

      내 뜨거운 혀를 깨물어 끊은 뒤

      종적 없이 사라졌지.

      나에게서 멀리 떠나 달그림자 뒤에 숨었지.

       

      실종된 그 여자를 파묻어 두고 나는 이처럼 시나 쓰네.

      시답지도 않은,

      시답잖은 시를 왜 쓰느냐고

      안나 아흐마토바가 아무리 힐난해도

      나는 연애하듯 시를 쓰고

      또 버리네.

       

      푸른 깃발 뒤덮이는 그믐밤이 오네.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에게 보여줄 졸작 시는 퇴고 중이고

      원스이너블루문(Once in a blue moon),

      달빛은 더욱 푸르고 농염하지.

       

      아무리 넓은 길을 향해 창문 열어젖혀도 끝끝내

      다듬어지지 않는 고집스런

      밤은 완강히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버틴다.

       

      계간 『문학과 의식』 2018년 가을호 발표

 


 

김영찬 시인

충남 연기에서 출생. 외국어대 프랑스語과 졸업. 2002년 《문학마당》과 2003년 《정신과 표현》에 작품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와 『투투섬에 안 간 이유』가 있음. 현재 웹진 『시인광장』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