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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길성 시인 / 꽃은 부드러운 칼입니다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9.

조길성 시인 / 꽃은 부드러운 칼입니다

 

 

당신이 칼을 들어 꽃을 베고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오늘 그 말씀이 내 혓바닥에서 다시 꽃피는 걸 봅니다. 꽃 속에는 망막 너머 깊은 바다가 있어 내 목젖 가까이 깊은 골목에까지 들어와 찰랑거립니다.

 

한때 당신이 우물이었을 적에, 나는 보름달이 지나가다 떨구고 간 고등어 비늘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고등어를 마당에 꽃 피우고야 말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주세요. 칼처럼 부드러운 꽃을 내 검은 혓바닥에 피는 꽃은 말고 의주나 블라디보스톡이나 봉천이나 길림이나 목단강이나 그런 이름들로 불러주세요. 그런 이름들은 자리끼 얼어붙는 저승 윗목쯤에 있어서 죽어서도 이 으드드득 부딪는 턱으로 남아있어서 씹어도 씹어도 다 씹지 못하는 되새김질이겠지요만, 아직도 고막에 맺힌 그 말씀으로 주세요.

 

다시 칼을 주세요. 아니 꽃을 길을 버린 이름들에게 말씀을, 물푸레나무 몽둥이나 소 좆 몽둥이로 맞아 흩어진 살점 닮은 꽃을 주세요. 연은 끊어져 날아가고 실타래는 엉켜버린, 이미 죽은 바람들이 날짜 지난 신문을 서로 읽으려 싸우다가 당신 뼈로 피리를 부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계간 『시산맥』 2017년 봄호 발표

 

 


 

조길성 시인

2008년 《창작21》로 등단. 시집으로 『징검다리 건너』(문학의전당, 2011)와 『나는 보리밭으로 갈 것이다』(b, 2017)가 있음. 현재 한국작가회의, 창작21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