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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덕규 시인 / 揚水機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9.

이덕규 시인 / 揚水機

 

 

  지난여름 내내 저 혼자 논두렁에 나와 앉아

  무슨 생각에 그렇게 골똘히 잠겼는지

  녹이 벌겋게 슬은 양수기에 스위치를 넣자마자

  헐은 위장 속에 고여 있던 침묵이

  역한 냄새를 풍기며 느닷없이 마려운 뒤를

  앞으로만 울컥울컥 뿜어내려는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다 묵은 체증을 게워내다 말고

  다시 시컹거리는 이 지독한 토사곽란,

  지하 암반수위에 미치지 못한

  흡입구 끝이 목매인 개처럼 혀를 길게 내밀고

  고인 물 끝 가이없는 허공에다

  타는 갈증만을 처박고 있는 것이리

 

  그 헛김 속에서 말들이 새어 나온다

  함부로 내뱉은 말들 숨겨져 찌들은

  어느 골 깊은 곳에 묵은 때로 늘어붙어 있던 활자들이

  뒤미처 달려나오다가 고속의 프로펠러에 휘감기어

  입 터지고 귀 떨어진 몰골들로

  붉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고 더러는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말들이

  碎石機 어금잇빨 같은 양수기 안쪽에 물려

  으적으적 씹히며 내뱉는 소음들 마침내

  썅썅거리며 공회전하는 주둥이로 꾸역꾸역 토해내는

  어둠들, 드러난 말의 바닥이여

 

  (허허 이게 무슨 말인가)

 

  그 어둡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들어가 보라

  後頭 끝에서도 다시 수천길

  아득한 적막을 뚫고 내려가면 거기 깊고 깊은

  맨 밑바닥에서 쉬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이

  아직 말에 이르지 않은 싯푸른 물결로 낮게 낮게 흘러가

  거대한 말씀의 저수지에 이르고 있는 것을

  결코 제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는 그 태아인

  언어들 속으로 더 길고 긴 호스 몇 다발 디밀고

  스위치를 넣으면 이윽고 하늘빛을 닮은

  무한대의 활자들이 이 가을 허공 한 복판으로

  힘차게 굽이치며 흘러가고 있는 것을

 

1998년 월간 《현대시학》 등단시

 

 


 

이덕규 시인

1961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 1998년 《현대시학》에 〈揚水機〉외 네 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