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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강하 시인 / 붉은 첼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5.

이강하 시인 / 붉은 첼로

 

 

  어둠 속 빛을 겨냥한 소리는 신중하다

  빛을 품은 축축한 것들이 구름 속에서 발화되는 것처럼

  구름이 태양을 알아가는 깨달음의 현絃

 

  둥근 턱을 바랬으나

  뾰쪽한 턱이 더 많았던 시간

  그러나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나뭇가지 슬픔도 감수한

  나이테 속 무중력의 악보들,

  덜 여문 관계까지 눈치 챈 이 빗소리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뼈를 깎는 논쟁이 있었기에

  온 세계가 모여 만찬에 들 수 있는 것

  이 세상 하나 밖에 없는 악기로 부산떠는 거지

  지난 잘못을 이제는 다신 거론 말자

  정작 상처 입은 사람은 왜 말이 없는지

  우리는 알면서도 모른 척, 현재의 실상에 박수를 치는 거지

 

  돌아서는 내가 두렵다

  내일은 언제나 다이어트, 뚱뚱하게 내리꽂는 비의 변곡점에

  눈을 떼지 못한 너도 두렵다

  야누스를 복면한 빗방울들이

  어느 복지관 굴뚝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저녁

 

계간 『시와 소금』 2012년 봄호(창간호) 발표

 

 


 

 

이강하 시인 / 저물녘

 

 

저물녘의 신비는 사소한 것으로부터 발산한다

아주 겸허하면서 적막히

 

소녀들이 살포시 눈을 뜨듯 빛을 꺼내는 친환경가로등에서, ‘잘근’ 신록을 씹는 수천 개구리 우는 소리에서, 한 번도 엇갈림 없이 생의 계단을 나란히 올랐을 것 같은 다정한 두 부부 뒷모습에서, 황소들이 먼 산 위 노을과 이별하는 부름에서, 초승달을 채워가는 강아지 속도에서, 사랑스러워 내 품는 소년의 분홍 입김에서, 떨어진 나뭇가지에 주춤거리다 치달리는 자전거바퀴에서, 방울꽃이 새 날개 속에서 끝없이 흔들린 것에서, 한생 한생이 출몰하는 매 순간은

 

떠난 사람이 누군가가 그리워 부는 트럼펫 소리

어둠의 공명은 무한한가

나는 이미 무아경이다, 걷는 내내

열도列島의 심연으로부터

 

사화집 (시와세계가 읽는 새로운 시, 2014) 발표

 

 


 

이강하 시인

경남 하동에서 출생. 2010년 《시와 세계》 하반기 신인상 詩부문에 〈숯가마〉 외 3편의 詩가 당선. 시집으로 『화몽(花夢)』(한국문연, 2007)와『붉은 첼로』(시와 세계, 2014)가 있음. 제4회『백교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