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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호 시인 / 안개
이것은 통찰의 거울에 번지는 피 그대 등 뒤로 튕겨오르는 허망의 파도다.
녹슨 우리의 살을 뚫고 흔들리는 이것은
새로 한 시쯤의 눈물이었다가 데살로니카전서 5장 3절의 젖은 아픔이었다가 새벽녘이면 뒷 울안 장미의 발등에 차가운 입술을 비빈다. 불가해(不可解)의 꽃이여. 아득하므로 너의 얼굴은 잔혹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흐릿한 창에 이마를 대면 무엇일까 지느러미를 흔들며 흔들며 홀연 목숨의 맨 안쪽을 깨무는 찬란한 향기.
손 저으면 마악 밑뿌리를 흔들며 가는 바람 한 자락이여. 빛을 닮은 커다란 손 하나가 또다시 서녘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말하라. 우리의 혼돈이 얼마나 건강한 눈물을 키워 왔는가를.
이것은 통찰의 거울에 번지는 피 그대 등 뒤로 튕겨오르는 허망의 파도다. 영원의 기슭에서 밀려와 영원의 기슭으로 멀어지는 소리.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시
손종호 시인 / 뿌리에 관한 비망록 · 1
1
1992년 여름, 금강을 거꾸로 접어올리며 우리는 저마다의 발원지로 향해 떠났다. 달빛 푸른 양산으로 구천동의 골짜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 결국은 갈참나무 너른 잎사귀에 뒹구는 이슬 몇 방울의 새벽을 보았다.
2
사과나무 씨앗에는 사과나무의 형상이 숨어 있다. 흘러가는 구름 속에는 누군가의 전 생애가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所)
채운산마루에 걸쳐 장엄하게 타오르는 놀빛이 내게 물었다.
3
과거는 흘러감으로 부질없고 오지 않는 미래는 강물에 비친 나리꽃 한 송이도 흔들지 못한다.
들숨과 날숨의 교차 속에 길은 오직 길로만 끝이 없다.
내 마음 위에는 바람 한 줄기도 얹지 마라. 흐르는 숨결조차 무시로 방향을 만든다.
4
---왜 하필이면 나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 왔는데 췌장암 선고를 받은 이우진집사가 서울아산병원 서관의 유리문을 밀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근원을 비추지도 못하면서 지상의 유리창들은 너무 투명하다.
5
새들은 허공을 놓아두고 산다. 별에 닿고자 구름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관여 없이 날개의 의식 없이 머무는 비행.
차를 두고 나온 오늘 천도 복숭아 예닐곱 개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오랜만에 아파트 앞 언덕을 오르니 별들의 처마냄새가 코에 닿는다.
시선집 『투명한 사랑』(한국문학도서관, 199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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