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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종호 시인 / 안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18.

손종호 시인 / 안개

 

 

  이것은

  통찰의 거울에 번지는 피

  그대 등 뒤로 튕겨오르는

  허망의 파도다.

 

  녹슨 우리의 살을 뚫고

  흔들리는 이것은

 

  새로 한 시쯤의 눈물이었다가

  데살로니카전서 5장 3절의

  젖은 아픔이었다가

  새벽녘이면 뒷 울안

  장미의 발등에 차가운 입술을 비빈다.

  불가해(不可解)의 꽃이여.

  아득하므로 너의 얼굴은 잔혹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흐릿한 창에 이마를 대면

  무엇일까 지느러미를 흔들며 흔들며

  홀연 목숨의 맨 안쪽을 깨무는

  찬란한 향기.

 

  손 저으면

  마악 밑뿌리를 흔들며 가는

  바람 한 자락이여.

  빛을 닮은 커다란 손 하나가

  또다시 서녘 한 페이지를 넘길 때

  말하라. 우리의 혼돈이

  얼마나 건강한 눈물을 키워 왔는가를.

 

  이것은

  통찰의 거울에 번지는 피

  그대 등 뒤로 튕겨오르는

  허망의 파도다.

  영원의 기슭에서 밀려와

  영원의 기슭으로 멀어지는 소리.

 

197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시

 

 


 

 

손종호 시인 / 뿌리에 관한 비망록 · 1

 

 

1

 

1992년 여름, 금강을 거꾸로 접어올리며

우리는 저마다의 발원지로 향해 떠났다.

달빛 푸른 양산으로

구천동의 골짜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

결국은 갈참나무 너른 잎사귀에 뒹구는

이슬 몇 방울의 새벽을 보았다.

 

2

 

사과나무 씨앗에는 사과나무의 형상이 숨어 있다.

흘러가는 구름 속에는 누군가의 전 생애가 깃들어 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所)

 

채운산마루에 걸쳐

장엄하게 타오르는 놀빛이 내게 물었다.

 

3

 

과거는 흘러감으로 부질없고

오지 않는 미래는 강물에 비친

나리꽃 한 송이도 흔들지 못한다.

 

들숨과 날숨의 교차 속에

길은 오직 길로만 끝이 없다.

 

내 마음 위에는

바람 한 줄기도 얹지 마라.

흐르는 숨결조차 무시로 방향을 만든다.

 

4

 

---왜 하필이면 나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 왔는데

췌장암 선고를 받은 이우진집사가

서울아산병원 서관의 유리문을 밀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근원을 비추지도 못하면서

지상의 유리창들은 너무 투명하다.

 

5

 

새들은 허공을 놓아두고 산다.

별에 닿고자

구름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

관여 없이 날개의 의식 없이

머무는 비행.

 

차를 두고 나온 오늘

천도 복숭아 예닐곱 개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오랜만에 아파트 앞 언덕을 오르니

별들의 처마냄새가 코에 닿는다.

 

시선집 『투명한 사랑』(한국문학도서관, 1999) 중에서

 

 


 

손종호 시인

1949년 대전에서 출생. 시인, 문학박사, 신학박사. 1979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의 당선과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새들의 현관』 등과 연구서 『김광섭문학연구』, 『문학의 경계와 지역문화주의』 외 다수 있음. 제 8회 한국비평문학상 본상, 한성기문학상, 대전시문화상 수상.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계간 『문학마당』 主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