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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인수 시인 / 수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9. 27.

장인수 시인 / 수염

 

 

새벽 5시, 거울을 보니 밤새 수염이 웃자랐다.

이놈 수염,

남성 호르몬을 남발하는 이놈의 자슥

내 얼굴에 쳐들어 와서 피부를 야곰야곰 묵정밭으로 만드는 녀석!

때론 안면몰수의 그런 너의 성품이 좋아서

내 턱과 입술 주위에 야생화를 피우겠지 싶어 몇 주 넘게 묵힌 적도 있겄만 수염은 볼품없는 잡초에 불과했더라.

촌놈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에 묻어있는 도시적 겉치레와 품격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수염을 깎지 않은 적도 있었다.

관우 장비의 수염 흉내를 내고

이황이나 이이 선생의 수염을 내심 바랬다.

이래도 저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수염아,

차라리 너는 개털처럼 자라기도 하거라.

나의 게으름을 맘껏 갉아먹고 천박하게 얼굴을 도배하고 꼬리를 치라.

수염은

감각령으로 피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얼굴 밖의 세상으로 쭉쭉 뻗어가서

독자적으로 운동하며 생존하기를 바란다.

내 몸뚱이를 숙주삼아

마구 파먹어라.

때로는 포도 넝쿨로 뻗어가서

나의 얼굴에 신사임당의 포도도(葡萄圖)를 그리고

입술을 악보로 삼아 포도주를 마시고 미친 가객의 헛소리를 부르렴.

수염아,

시커먼 세월의 뿌리야!

너는 내 얼굴에 출몰하지만

나의 통제를 벗어나

네 멋대로 미치광이의 삶을 살아라.

갈대숲이 되어 새 둥지를 틀다가

수염아,

야크의 털이 되어 천상에 가 닿을 차마고도의 험난한 길을

폭설처럼 휘날리거라.

내 얼굴 따위는 짓뭉개버려라.

 

계간 『시평』 2011년 가을호 발표

 

 


 

 

장인수 시인 / 낙지볶음밥

 

 

  식당 창문 밖은 한창

  휘날리며 쏟아지는 낙지알같은 꽃비늘

  저것이 번성기의 몸부림인가?

  꽃몸살인가?

  수억 만 송이 꽃비늘이 되고, 꽃혈통이 되고, 꽃섬광이 되고, 꽃탄생석이 되고……

 

  산낙지볶음을 먹었다

  낙지보다 더 뜨겁게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입술

  인동 장씨 종가의 맏며느리

  두 시간 넘게

  그녀는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양가 친척은 대가족

  백여 명에 가까운 자손을 봤는데

  끊임없이 치다꺼리하면서 살아왔노라고

  낙지볶음이 맵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조만간 또 곡비(哭婢)가 되어야 할 것 같다면서

  시원하게 콩나물국을 들이켠다

  후루룩! 후루룩!

 

  그녀의 몸과 영혼에 수많은 낙지 구멍들……

  식당 창문 밖

  만개한 벚꽃은 벚나무의 구멍자리가 아닐까

  흐드러진……꽃구멍

  꽃구멍……여자보다 깊은……어질어질……깊고 깊은 향기의 세계

  꽃의 몸부림

  꽃더듬이가 되고, 꽃우화(羽化)가 되고, 꽃초신성이 되고……

  지구가 몸부림치며 꽃잎이 흩날리고 있다

 

계간 『시산맥』 2012년 가을호 발표

 

 


 

장인수 시인

1968년 충북 진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  2003년 계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유리창』(문학세계사, 2006)과 『온순한 뿔』(황금알, 2009)이 있음. 현재 서울 중산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