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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길상호 시인 / 모르는 척, 아프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4.

길상호 시인 / 모르는 척, 아프다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끊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시집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 중에서

 

 


 

 

길상호 시인 / 눈의 심장을 받았네

 

 

  당신은

  새벽 첫눈을 뭉쳐

  바닥에 내려놓았네

 

  그것은

  내가 굴리며 살아야 할

  차가운 심장이었네

 

  눈 뭉치에 기록된

  어지러운 지문 때문에

  바짝 얼어붙기도 했네

 

  그럴 때마다

  가만히 심장을 쥐어오던

  당신의 손,

 

  온기를 기억하는

  눈의 심장이

  가끔 녹아 흐를 때 있네

 

시집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 중에서

 

 


 

길상호 시인

1973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그 노인이 지은 집〉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문학세계사, 2004)와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2007), 『눈의 심장을 받았네』(실천문학사, 2010)가 있음. 2004년 현대시동인상, 천상병 시상, 김달진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