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외자 시인 / 루드베키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서 쉼보르스카 시집을 꺼낸다 책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삼십분만 소리죽여 울다가 일어설 것이다 루드베키아가 피어있는 간이역 서로 떨어진 꽃잎이 제각각 바라보는 방향으로 이별은 역사의 빈 공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시들고 있다 누군가 새롭게 만들고 있다 만남을 잃어버린 역사에서 모든 것은 이별의 진행 방향이다 기차가 떠난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 속에 내가 없어도 아무도 주의 하지 않는다* 의자 위에는 바람이 시든 장미 다발처럼 놓이고 나는 선로 건너편 루드베키아 꽃밭 속으로 시베리아로 안데스로 히말라야로 실크로드로 샛노란 꽃잎의 길이 열린다 이 많은 길을 누가 만들었을까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났다네 또 다른 루드베키아 한 송이가 새로 핀다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것도 아니고 이별은 일상이 되고 이제 얼굴을 책으로 가리고 혼자 울지 않아도 된다
* 쉼보르스카 시인의「역」부분
계간 『열린시학』 2007년 가을호 발표
천외자 시인 / 별이 빛나는 밤에
외롭고 쓸쓸한 산골짜기의 밤에는 버렸던 이름도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러나 새 것이 좋다
오소리를 보았다 새끼 고라니를 보았다 고라니를 자세히 보려고 차창 문을 열다가 별무리를 보았다
별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별들아 별들아 내가 보이니
산골에는 어둠을 밝힐 불이 부족, 속수무책 무엇으로 불을 켜야 할지 여기는 캄캄한 길 위 별이 나를 보도록 불을 켜야 할 텐데
애벌레처럼 꼼지락거리는 저 높은 하늘의 별들아 눈을 번쩍 떠 보렴 고라니가 보이니 오소리가 보이니 지상에서는 살과 살이 부딪혀 번쩍하고 빛났다가 유성처럼 떨어질 때가 있고 뼈가 불타오를 때가 있어
별들아 산길 모퉁이를 돌아돌아 비좁은 산길에서 혼자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니
보이지 않더라도 하늘에서 내려올 필요는 결코 없고 없고 말고 눈부시게 사랑할 때도
계간 『열린시학』 2009년 겨울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정인 시인 /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외 1편 (0) | 2019.10.04 |
|---|---|
| 박무웅 시인 / 사석(捨石) 외 1편 (0) | 2019.10.04 |
| 길상호 시인 / 모르는 척, 아프다 외 1편 (0) | 2019.10.04 |
| 장성혜 시인 / 어쩔 수 없는 그물 (0) | 2019.10.04 |
| 배옥주 시인 / 꽃가루 알레르기 (0) | 2019.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