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시인 / 논둑에서 울다 2
그냥 보면 안다. 다 안다. 도랑 쪽으로 귀 열어두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저 살림살이의 간결함. 산 하나를 다 담고도, 천년에 걸친 한 가계(家系)의 역사를 저리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음을.
아프면 아픈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해, 네 맘 다 알고말고, 괜찮아, 좀 쉬었다가면 돼, 덮고도 남지, 알고말고 도랑물이 논으로 흘러든다.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 중에서
이승희 시인 / 희고 붉은 감자꽃 필 때
햇살의 애를 배어, 석 달 열흘을 보채는 햇살의 마음을 배어
땅 속 깊은 곳에 흰 등(燈)을 걸어두고 날마다 그리움의 신방(新房)을 차렸구나. 오, 어여뻐라 이 죄 없는 사랑 앞에 나는 무릎 꿇고 운다. 이 모든 비밀을 가슴에 묻고 부풀어 오르는 뜨거움을 한칼씩 베어내며 살았을 이 물기 가득한 가슴에 엎드려 나는 오래 운다.
초승달이 보름달로 옮겨지던 그 저녁이었구나, 까닭도 없이 가슴이 터질 듯 하던 그 밤이었구나. 열 손가락을 다 비추고도 남던 그 달빛아래서 몸 풀었던 게구나. 수천수만의 강줄기가 내게로 와 노래 불렀고, 낮고 오랜 기다림의 편지가 결국 네게 닿았구나. 그랬니? 그랬었구나, 내 눈물 자꾸 뜨거워지고, 푸른 행성이 지나며 둥글게 네 신방을 가려주었던게구나.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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