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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신용 시인 / 도장골 시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6.

김신용 시인 / 도장골 시편

ㅡ넝쿨의 힘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

  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 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시집 『버려진 사람들』(천년의시작, 2003) 중에서

 

 


 

 

김신용 시인 / 양동시편(陽洞詩篇) 2

―뼉다귀집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 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주워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뉘 입에선지 모르지만 그냥 뼉다귀집으로 불리우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어쩌다 살점이라도 뜯고 싶은 사람이 들렀다가는

  찌그러진 그릇과 곰팡내 나는 술청 안을

  파리와 바퀴벌레들이 거미줄의 弦을 고르며 유유롭고

  훔친 자리를 도리어 더럽힐 것 같은

  걸레 한 움큼 할머니의 꼴을 보고는 질겁을 하고

  뒤돌아서는 그런 술집이지만요

  첫새벽 할머니는 뼉다귀를 뿌연 뼛물이 우러나오도록

  고아서 종일토록 뿌연 뼛물이 희게 맑아질 때까지

  맑아진 뼛물이 다시 투명해질 때까지

  밤새도록 푹 고아서 아침이 오면

  어쩌다 붙은 살점까지도 국물이 되어버린

  그 뼉다귀를 핥기 위해

  뼈만 앙상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지요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

  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

  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시집 『버려진 사람들』(천년의시작, 2003) 중에서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출생.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 시편』등이 있음. 2005년 제7회 천상병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