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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지하 시인 / 어떤 각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7.

최지하 시인 / 어떤 각오

 

 

여기는 빈 칸이 많은 계절이라고 첫 줄에 쓴다.

목구멍을 넘기지 못한 문장이 여름의 이면에서 검게 우거지고 있을 때

하루에 한 칸씩 켜지는 창문

미열의 저녁은 저 창을 통해 오나.

 

그림자의 반쯤은 나도 모르게 네가 살지 않는 곳에 두고 온 불안을

혀를 깨물며 자꾸만 말을 참는 갈등을 낮이 깜깜해지는 현상이라 다시 쓰고

반복적으로 닫히기만 하는 문 앞에서 나는 언제나 바깥인데

세상의 그 무성한 문은 어디를 향해 열리나.

 

자동판매기에 동전만 넣으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울음이 있다면

장식 하나 달지 않은 낱말들을 지겨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서랍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둔 감정들이 서로의 급소를 틀어쥐고 있어

구체적으로 울어본 적이 없다.

 

진실이란 건 영원히 불가능한 슬픈 단위.

어떤 징후로 꽃들은 자세히도 피어 심장의 색을 바꾸는지

마지막 행에 다다랐으니

마침내 외로워져야지.

 

계간『다층』 2018년 여름호 발표

 

 


 

 

최지하 시인 / 낙관주의

 

 

당신, 무얼 하고 있습니까

 

또 한 번 죽어볼 수 있는 밤이 온 힘을 다해 들끓고 있네

깊어지기 위한 것들은 필사적으로 밤이 되려하네

 

목구멍에서 울컥 목련이 피고, 들키고 싶지 않아 한 번도 말하지 않은 생각의 오른쪽을 지우네

유리창 밖에는 죽음을 방관하는 사람들이 늘어서있네

 

안과 밖의 간격은 문을 여는 손과 햇빛을 가리는 손바닥의 거리, 목련이 피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네

그렇게 단정한 속도 안에서는 조금 더 신중하게 그늘로 서있어야 한다는 걸

당신, 알고 있습니까

 

높은 방향을 가진 의자는 공손한 각도에서만 보게 되는 먼 곳,

구부려 앉지 않아도 보이는 정수리에서 반쪽만 자라나는 뿔들에 대해 당신에게 목숨 걸 계절이 남아있다고 쓰네

 

모르는 사람에게 팔려나가는 꿈을 슬퍼하지는 않네

한 평의 어둠을 함께 쓰고 있는 열 마리의 새가 마지막 문장을 베끼고 있네

컹컹, 집요하게 마침표를 물고 서있네

 

여수작가 2018년 제6호 발표

 

 


 

최지하 시인

충남 서천에서 출생. 광운대학교 대학원 졸업. 201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꼭 하고 싶은 거짓말』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