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봉 시인 / 꿈아, 무정한 꿈아
젖은 베 행주 (외할머니 눈물로 젖은 마음골짜기 같은), 마른 면 행주 (외할머니 바짝 마른 하얀 젖가슴 같은), 빨락 종이, 가위. 반질한 맏물고추를 도마에 놓고 위 아래로 알맞게 잘라낸다. 원기둥꼴이 된 붉은 고추의 안팎 칼자국이 다른, 뱃속까지 잘 익은 노란 꿈씨를 털어낸다.
독립운동 힘 보태는 남편한테 노잣돈 넉넉히 챙겨 보내지 못했던 일에 늘 싸아한 가슴, 고추 살을 겹쳐 놓은 채 칼로 가느다랗게 채를 썬다 매운 냄새가 코끝까지 아리다. 바람처럼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남편의 입맛을 위해, 좋아했던 준치 민어 생선조림, 물쑥나물, 말린 가지나물, 그 위에 몇 올 올려놓았던 동글동글한 실고추들, 손끝들.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 오시는 님을 보내는 꿈아, 잠이 든 나를 깨워나 주지)
뼈 저릿저릿 치운 세월도 은발에 하얗게 삭은, 할머니의 간절한 가위질은 그리움 달래는 싹둑 소리, 실고추 갈무리 해 둔 금빛 같은 시간들이 마련한 속 소리도 들린다.
올해가 광복 70돐. (바이올린을 잘 켰던) 외할아버지 이름은 잊혀진 꿈 속 사진 두어 장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빠른 흘림체 마지막 편지 한 통뿐, 행방불명 된 흔적들.
문구점에서 내가 사 온 빨락 종이는 꼬깃꼬깃한 백년의 시간을 알뜰살뜰 비쳐준다, 한결 맵게 채쳐 갈무리 할 것들, 상스럽다. 희나리 지스러기는 제쳐 버리고, 맛깔스럽게 마음에 간직해 둘 저 멋, 제 둘레를 동글동글 붉게 물들일 예스러운 차림, 실고추.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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