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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선 시인 / 그대에게 가는 배 한 척을 세우기 위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7.

정선 시인 / 그대에게 가는 배 한 척을 세우기 위해

 

 

불현듯 가방을 꾸렸네 언제나 결정은 새벽에 왔네 새벽을 세 번 부인하는 그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였네 귀를 막았네 안개와 그대는 한통속 아침이 오는 것을 훼방 놓았네

 

터널을 여덟 번 지나고 산맥의 늑골을 보고서 내 사랑의 조잡함을 알았네 그대에게 가는 배 한 척을 짓는 일은 혁명이라네 나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은 그대 무작정동쪽 끝으로 가네

 

혁명,

 

그곳에는 해가 뜬다지 나의 해안에는 그토록 밝은 해가 뜬 적이 없다네 그대의 눈빛 하나에 돌멩이 하나 그대의 호흡 하나에 돌멩이 하나를 얹었네 새벽마다 몰래 와서 그믐달로 돌탑을 싹둑 베어간 그대 바람과 바다의 경계 머묾과 떠남의 경계 떨림과 울림의 경계가 의심스러워질 때쯤 나는 이 발걸음을 멈출 것이네 그 경계 너머 자몽처럼 환하게 빛날 그대 얼굴 이 곳 해안은 혁명은커녕 갈매기들 아귀다툼으로 떠들썩하다네

 

혁명,

 

지금은 그리움의 우기, 비가 내리네 그대에게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아 우산도 없이 식사도 없이 휑뎅그렁한 방파제에 서네 그대는 혁명을 노래하려 기타 하나 달랑 메고 떠났네 까 보다 로까를 돌아 하바나로 부에나비스타에서 그대가 부르는 찬찬(Chan Chan)은 언제나 파도를 타고 왔네 귓가에 쟁쟁한 그대, 그대는 언제나 오지 않을 산두골 완행버스처럼 올 것이네

 

빌어먹을 그리움

 

나는 그리움의 수인, 그리움의 절벽에 당도했네 해맞이 언덕에 그대 문득 나보다 먼저 서 있을지 몰라 떨림은 혁명의 선율을 배반하지 나는 울림의 배 한 척을 세우려네 그대의 앙가슴, 하바나에 살포시 얹히는 돛단배 한 척을

 

혁명,

 

몽골의 기마병처럼 파도가 몰려드네 광야에서 울부짖는 바람소리 흐미를 듣네 나를 미치게 만드는 것들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절망 같은 것들 혁명의 불완전한 호흡들 이쯤에서 내 눈물은 리듬을 타네 눈물 없이 해협을 건넌 이들은 닌자들이네 내 가슴에 한 점 얼룩이 된 혁명 언덕 위 배가 혁명의 닻을 올리려면 불면의 황포를 몇 폭이나 깁어야 할까

 

혁명,

 

그대를 잊는 것은 아우슈비츠 주검의 금발로 짠 담요를 덮는 일보다 더 끔찍한 일 혁명의 수인인 그대,가 좋아하는 혁명을 나지막이 불러보네 오늘 그대에게 닿는 ‘혁명’한 척을 세우기 위해 해맞이 언덕에 돛단배를 밀어올리네 미완은 아름답다네 그대, 슬픈 혁명의 완성을 위해 내게 총부리를……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천년의시작, 2010) 중에서

 

 


 

 

정선 시인 /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

 

 

  랭보는 탁상에 올라가 오줌을 갈겼다

  지팡이를 목에 두르고 깃털을 머리에 꽂고

  입술에 장미를 붙인 부르주아 예술가들

  모두가 애송이라 코웃음쳤것다

  랭보의 오줌발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가시는 입술에 머리에 목에 박혔다

  그가 웃어제낄 때마다 지린내가 진동했다

  열일곱 나이에 랭보는 예술을 알아버렸단 말이냐

  그 속 빈 환상을

  내가 랭보에게 반한 건 순전한 그의 오줌발

  랭보의 오줌발이 삼 센티미터만 길었어도

  파리는 살아 퍼덕거렸을까

  랭보가 아프리카로 간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파리에서 보낸 한철, 그가 핥았던

  베를렌의 탱탱한 엉덩이에서도 예술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꽃이 피지 않는 엉덩이

  울었다 랭보는

  하늘 아래 어디에도 손잡을 이 없고

  예술은 기우뚱 갸우뚱

  찢어진 웃음에 감춰진 삐에로의 눈물을

  단호하게 외면하는 거리

  그의 몸은 바람의 식민지가 되었다

  어쩌자고 파리를 버리고 지중해 태양과 뒹굴었을까

  시와 맞바꾼 커피와 무기 그리고 썩어가는 무릎

  구멍 난 바람을 신고 사라진 랭보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했고

  랭보의 오줌발이 버거울 즈음

  놀리는 입술에 눌려 내 안의 랭보들이 퍼렇게 질려갔다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기보다 한순간에 타 버리는 것이 낫지*

  어둠 속 누군가가 광장 가운데에 섰다

  바람에게 피와 살을 내어준 채

  등뼈 하나로 곧추선 랭보

  내 무릎 위에 그가 다시 앉았다

  썩어가는 내 무릎에서 젖이 흘렀다

  이 하얀 지옥불!

  나는 도끼로 왼다리를 잘랐다

  그때 일제히 핏기가 내 아랫도리에 몰렸다

  오줌이 치솟았다

  저 빛나는 오줌발

  저 찬란한 타락

  순간 내 눈이 밝아졌다

 

  나는 바람을 고쳐 신는다

  구두여

  부디 내게 길을 가르치지 말아다오

 

* 커트 코베인의 유서 중에서 따옴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천년의시작, 2010) 중에서

 

 


 

정선 시인

전남 함평에서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2006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 『랭보는 오줌발이 짧았다』(천년의시작, 2010)와 에세이집 『내 몸 속에는 서랍이 달그락거린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