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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경순 시인 / 날멸치를 고추장에 푹 찍다가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8.

박경순 시인 / 날멸치를 고추장에 푹 찍다가

 

 

한 끼 밥상이 비릿해집니다.

 

엄마네 고추장독이 태풍 솔릭에 와락 쏟아져내리지 않았는지

누이가 멸치똥을 발라내는데 동생의 식성이 딸려 나와

수북하게 대가리들이 들이대며

밥상머리에서도 은빛으로 빛나는 비늘입니다만

퉁퉁 분 누른밥 한 숟가락 무는데

까무룩 대학시절 남매가 함께 간 영화관이 올라옵니다.

 

디어헌터의 장면장면이 누이의 졸음으로 자막이 흐릿해졌고

시험끝이라는 변명이 무색하게도

영화보며 조는 게 백 퍼센트 확률에 가까운

상습범의 누이라는 게 목이 메입니다.

 

가부장적 집안의 장남이라는 굴레는

딸 셋으로 단산을 하며 벗어 던졌지만

올해 막내 딸 소영이가 수능을 치루고 대학생이 되어

부녀지간 나란히 영화관에 가는 상상이

멸치 뼛속까지 고추장 짠내로 쩔어 달달한 맛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18년 10월호 발표

 

 


 

박경순 시인

1998년 <물푸레나무의 신화 속에서>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밥상 차리는 노라』, 『사랑아, 내가 널 쓸쓸하게 했구나』, 『지독한 마법』, 『꽃 가운데 김 여사님』, 『네가 부르는 소리에 내가 향기롭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