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규미 시인 / 이만 촌이라든가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7.

권규미 시인 / 이만 촌이라든가

 

 

벚나무 아래에서는 슬픔을 꽃이라 불러도 좋아

 

타닥타닥 타오르는 어둠의 심지와 말랑한 눈발들의 분분한 적막들

그 낱낱의 이름을 슬픔이라고 해 봐

 

그렇게 생각해 봐

 

금방 태어난 아가처럼 가만히 눈을 감은 물방울의 시간들이

가지마다 오종종한 저 머나먼 나무들의

 

수 천 수 만 꾸러미의 물색없이 뒤엉킨 실타래들을

투명한 물레로 가만히 자아 들이는 손가락 손가락들, 그

 

푸르고 흰 휘파람소리

 

존재의 절반이 자주 그늘인 건 어쩌면 나무들 탓이지

이만 촌이라든가 그 너머라든가 하는 생경한 이념의 거리보다

 

아득히 먼 시간 속

나의 할머니가 나무였다니

 

안개와 바람과 얼음의 동굴너머 유유히 빛나는 아침마다

초록빛 둥근 신전이었다니

 

어린 나무 한 가지처럼 허공에 기대어

심장에서 심장으로 다정히 타오르는 슬픔, 한번 꿈꾸어 봐

 

웹진 『시인광장』 2019년 5월호 발표

 

 


 

권규미 시인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3년 월간 《유심》에 <희고 맑은 물소리의 뼈> 외 4편으로 등단. 2012년 경주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