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열 시인 / 커서
1.
지붕에서 빛나는 눈이 처마의 한곳에서 뚝뚝 빛이 흘러내리고 있다
바닥으로 떨어진 물빛들은 고랑을 타고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지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 하나 없는 마당은 아직도 쌓인 눈으로 눈이 부셨다
2.
벽돌이 한 장 한 장이 쌓여지고 있다
아버지가 막노동현장에서 쌓아 올리신 것처럼 쌓고 있다 바쁘게 쉼 없이 올려놓는 벽돌
당신이 칠십 평생 하셨던 것처럼
벽돌위에 벽돌이 그 벽돌위에 또 벽돌을 쌓고 있다 헛것처럼
3.
외할머니 댁에 가는 길
까까머리 아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개울물 앞에 한나절이나 서있다
또래아이들은 잘도 건너 오고가는데 징검돌을 건너뛰기가 망설여지는 것이다
돌 사이 그 반짝 반짝거리는 빛 속으로 순간 사라질까봐
매번 징검돌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4.
컴퓨터모니터 백지는 내가 걷기에는 너무 넓다
속은 또 얼마나 깊을까하고 머리통을 가운데에 푹 쑤셔 넣고 보니
툇마루에 앉아 할머니가 맷돌에 콩알을 넣으며 돌리고 계셨다
한복 입으신 모습이 참으로 고우셨다 멀리서도 흰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마당에서 물끄러미 보는 나를 향해 할머니가 애기처럼 웃으셨다,
라고 썼다가 앉아계신 모습이 빛 부셔 눈이 아파 눈물이 났다, 라고 고쳐 썼다
웹진 『시인광장』 2019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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