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화 시인 / 칸트의 동물원
1
꼬리를 밟지 않기에는 꼬리는 너무 길고 가늘고 아름답다
2
고개가 반쯤 기울어졌다면 그건 자세가 아니라 행위지 초록 스타킹은 탄력을 잃고 곧 허물어진다 두 다리는 반복적이지만 길은 곧 사라지지 서툰 것들은 피를 흘리고 내내 피를 흘리지
3
고양이와 나는 밤의 골목에서 따로 헤매고 밤낮 없이 차들은 달린다 헤드라이트는 눈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104동을 기어오르는 달과 허물어지는 쓰레기더미 뒤돌아보면 꼬리뿐인 고양이
4
한밤의 전화벨 소리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깨던 사람이 갑자기 고여해진다면 얼마나 쓸쓸해질 것인가 하늘은 얼마나 새파랗게 금 갈 것인가 남의 머리통을 부수던 사람이 제 머리통까지 부순다면 얼마나 서러워질 것인가 한 밤의 전화벨 소리
5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돈다면 그건 사라지는 놀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라도 중간부터 시작된다
시집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 중에서
이근화 시인 / 우리들의 진화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 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먹는 프레스機의 진화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그라미가 되어 간다
긴 손가락으로 긴 손가락을 잡으면 더 큰 동그라미들이 태어날까 더 많이 태어났다 오래 죽어갈 수 있을까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
우리는 일어나서 웃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나는 점점 더 물렁해지며 아무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외로운 자들이 자꾸 명랑해지는 이유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말이 없고 불만이 없는 자들이 사라질 미래를 향해 걸었다
저 나무를 들어 올리면 몇 채의 집이 쓰러질까 저 산을 뽑아낼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내리는 비는 본 적이 없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돌고 우리는 안전하게 다시 웃었다
시집 『우리들의 진화』(문학과지성사, 20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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