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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근화 시인 / 칸트의 동물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27.

이근화 시인 / 칸트의 동물원

 

 

   1

 

  꼬리를 밟지 않기에는

  꼬리는 너무 길고 가늘고 아름답다

 

  2

 

  고개가 반쯤 기울어졌다면

  그건 자세가 아니라 행위지

  초록 스타킹은 탄력을 잃고

  곧 허물어진다

  두 다리는 반복적이지만

  길은 곧 사라지지

  서툰 것들은 피를 흘리고

  내내 피를 흘리지

 

  3

 

  고양이와 나는

  밤의 골목에서

  따로 헤매고

  밤낮 없이 차들은 달린다

  헤드라이트는 눈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104동을 기어오르는 달과

  허물어지는 쓰레기더미

  뒤돌아보면 꼬리뿐인

  고양이

 

  4

 

  한밤의 전화벨 소리

  맥주병을 거꾸로 들고 깨던 사람이

  갑자기 고여해진다면

  얼마나 쓸쓸해질 것인가

  하늘은 얼마나 새파랗게 금 갈 것인가

  남의 머리통을 부수던 사람이

  제 머리통까지 부순다면

  얼마나 서러워질 것인가

  한 밤의 전화벨 소리

 

  5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돈다면

  그건 사라지는 놀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라도 중간부터

  시작된다

 

시집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 중에서

 

 


 

 

이근화 시인 / 우리들의 진화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 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먹는

  프레스機의 진화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그라미가 되어 간다

 

  긴 손가락으로 긴 손가락을 잡으면

  더 큰 동그라미들이 태어날까

  더 많이 태어났다 오래 죽어갈 수 있을까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

 

  우리는 일어나서 웃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나는 점점 더 물렁해지며 아무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외로운 자들이 자꾸 명랑해지는 이유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말이 없고 불만이 없는 자들이 사라질 미래를 향해 걸었다

 

  저 나무를 들어 올리면 몇 채의 집이 쓰러질까

  저 산을 뽑아낼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내리는 비는 본 적이 없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돌고

  우리는 안전하게 다시 웃었다

 

시집 『우리들의 진화』(문학과지성사, 2009) 중에서

 

 


 

이근화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현대문학》에 〈칸트의 동물원〉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민음사, 2006)과 『우리들의 진화』(문학과지성사, 2009)가 있음. 윤동주상 젊은작가상 ․ 김준성문학상 수상. 현재 '천몽'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