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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백석 시인 / 월림(月林)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9.

백석 시인 / 월림(月林)장

 

 

`자시동북팔십천희천(自是東北八○천희川)'의 팻말이 선 곳

돌능와집에 소달구지에 싸리신에 옛날이 사는 장거리에

어느 근방 산천에서 덜거기 껙껙 건방지게 운다

 

초아흐레 장판에

산 멧도야지 너구리가죽 튀튀새 났다

또 가얌에 귀이리에 도토리묵 도토리범벅도 났다

 

나는 주먹다시 같은 떡당이에 꿀보다도 달다는 강낭엿을 산다

그리고 물이라도 들듯이 샛노랗디 샛노란 산(山)골 마가슬볕에 눈이 시울도록 샛노랗고 샛노란 햇기장쌀을 주무르며

기장쌀은 기장차떡이 좋고 기장차랍이 좋고 기장감주가 좋고 그리고 기장쌀로 쑨 호박죽은 맛도 있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기쁘다

 

조선일보, 1939. 11. 11

 

 


 

 

백석 시인 / 이두국주가도(伊豆國湊街道)

 

 

옛적본의 휘장마차에

어느메 촌중의 새 새악시와도 함께 타고

먼 바닷가의 거리로 간다는데

금귤이 눌한 마을마을을 지나가며

싱싱한 금귤을 먹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시와 소설, 1936. 3

 

 


 

 

백석 시인 / 적경(寂境)

 

 

신 살구를 잘도 먹더니 눈 오는 아침

나어린 아내는 첫아들을 낳았다

 

인가(人家) 멀은 산(山)중에

까치는 배나무에서 짖는다

 

컴컴한 부엌에서는 늙은 홀아비의 시아부지가 미역국을 끓인다

그 마을의 외따른 집에서도 산국을 끓인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시인 / 적막강산

 

 

오리밭에 벌배채 통이 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

 

산에 오면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 소리

 

벌로 오면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밭에 갈새 소리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

 

정주(定州) 동림(東林) 구십(九十)여 리(里) 긴긴 하룻길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에 오면 벌 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신천지, 1947. 12

 

 


 

 

백석 시인 / 정문촌(旌門村)

 

 

주홍칠이 낡은 정문(旌門)이 하나 마을 어구에 있었다

 

「효자노적지지정문(孝子盧迪之之旌門)」―먼지가 겹겹이 앉은 목각(木刻)의 액(額)에

나는 열 살이 넘도록 갈지자(字) 둘을 웃었다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가득하니 꿀벌들이 많이 날아드는 아침

구신은 없고 부엉이가 담벽을 띠쪼ㅎ고 죽었다

 

기왓골에 배암이 푸르스름히 빛난 달밤이 있었다

아이들은 쪽재피같이 먼 길을 돌았다

 

정문(旌門)집 가난이는 열다섯에

늙은 말꾼한테 시집을 갔겄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白石, 1912.7.1 ~ 1995] 시인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본명은 백기행(夔行). 오산학교를 거쳐 동경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 1935년8월31일《조선일보》에 시 〈定州城〉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사슴』(선광인쇄주식회사, 1936)이 있음. 199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