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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백석 시인 / 여우난골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8.

 백석 시인 / 여우난골

 

 

박을 삶는 집

할아버지와 손자가 오른 지붕 위에 하늘빛이 진초록이다

우물의 물이 쓸 것만 같다

 

마을에서는 삼굿을 하는 날

건넛마을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왔다

 

노란 싸릿잎이 한 불 깔린 토방에 햇츠ㄺ방석을 깔고

나는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었다

 

어치라는 산(山)새는 벌배 먹어 고웁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아픈 배를 아이들은 열배 먹고 나았다고 하였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시인 / 연자간

 

 

달빛도 거지도 도적개도 모두 즐겁다

풍구재도 얼룩소도 쇠드랑볕도 모두 즐겁다

 

도적괭이 새끼락이 나고

살찐 쪽제비 트는 기지개 길고

 

홰냥닭은 알을 낳고 소리치고

강아지는 겨를 먹고 오줌 싸고

 

개들은 게모이고 쌈짓거리하고

놓여난 도야지 둥구 재벼오고

 

송아지 잘도 놀고

까치 보해 짖고

 

신영길 말이 울고 가고

장돌림 당나귀도 울고 가고

 

대들보 위에 베틀도 채일도 토리개도 모두들 편안하니

구석구석 후치도 보십도 소시랑도 모두들 편안하니

 

조광, 1936. 3

 

 


 

 

백석 시인 / 오금덩이라는 곳

 

 

어스름 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여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어 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벌개누ㅍ녘에서 바리깨를 두드리는 쇳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아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부르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술ㄱ에 저린 팔다리에 거마리를 붙인다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 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팥을 깔이며 방뇨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사슴, (자가본), 1936

 

 


 

 

백석 시인 / 오리

 

 

오리야 네가 좋은 청명(淸明) 밑께 밤은

옆에서 누가 뺨을 쳐도 모르게 어둡다누나

오리야 이때는 따디기가 되어 어둡단다

 

아무리 밤이 좋은들 오리야

해변 벌에선 얼마나 너희들이 욱자지껄하며 멕이기에

해변 땅에 나들이 갔던 할머니는

오리 새끼들은 장모ㅎ이나 하듯이 떠들썩하니 시끄럽기도 하더란 숭인가

 

그래도 오리야 호젓한 밤길을 가다

가까운 논배미들에서

까알까알하는 너희들의 즐거운 말소리가 나면

나는 내 마을 그 아는 사람들의 지껄지껄하는 말소리같이 반가웁고나

오리야 너희들의 이야기판에 나도 들어

밤을 같이 밝히고 싶고나

 

오리야 나는 네가 좋구나 네가 좋아서

벌논의 늪 옆에 쭈구렁벼알 달린 짚검불을 널어 놓고

닭의 지ㅊ 올코에 새끼 달은 치를 묻어 놓고

동둑 넘에 숨어서

하루종일 너를 기다린다

 

오리야 고운 오리야 가만히 안겼거라

너를 팔아 술을 먹는 노(盧)장에 영감은

홀아비 소의연 침을 놓는 영감인데

나는 너를 백통전 하나 주고 사 오누나

 

나를 생각하던 그 무당의 딸은 내 어린 누이에게

오리야 너를 한 쌍 주더니

어린 누이는 없고 저는 시집을 갔다건만

오리야 너는 한 쌍이 날아가누나

 

조광, 1936. 2

 

 


 

 

백석 시인 / 오리 망아지 토끼

 

 

오리치를 놓으러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 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 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두 던져 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커다란 소리로

―매지야 오너라

―매지야 오너라

 

새하러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산(山)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 굴을 아배와 내가 막아서면 언제나 토끼 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사슴, (자가본), 1936

 


 

백석(白石) 시인 (1912.7.1~1995)

본명 백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