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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목월 시인 / 나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7. 18.

박목월 시인 /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시집 <청담>(1964) -

 

 


 

 

박목월 시인 / 만술(萬述) 아비의 축문(祝文)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들이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亡靈)도 응감(應感)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 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엄첩다 : (손아래 사람의 행동에 대해) 대견스럽다.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 시인 / 이별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 시인 / 하관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난(蘭), 기타>(1959)-

 

 


 

박목월[朴木月, 1915.1.6~1978.3.24] 시인

본명은 영종(泳鍾). 1916년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자람.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 졸업. 정지용(鄭芝溶)에 의해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과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그밖의 저서로는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음.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및 1963년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역임.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 1978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