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나무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시집 <청담>(1964) -
박목월 시인 / 만술(萬述) 아비의 축문(祝文)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들이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 많이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亡靈)도 응감(應感)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 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엄첩다 : (손아래 사람의 행동에 대해) 대견스럽다.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 시인 / 이별가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 시인 / 하관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난(蘭), 기타>(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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