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시인 / 밤 바다에서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 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 <춘향이 마음>(1962) -
박재삼 시인 / 수정가
집을 치면 정화수 잔잔한 위에 아침마다 새로 생기는 물방울의 선선한 우물집이었을레. 또한 윤이 나는 마루의, 그 끝에 평상의, 갈앉은 뜨락의, 물냄새 창창한 그런 집이었을레. 서방님은 바람 같단들 어느 때고 바람은 어려 올 따름, 그 옆에 순순(順順)한 스러지는 물방울의 찬란한 춘향이 마음이 아니었을레.
하루에 몇 번쯤 푸른 산 언덕들을 눈 아래 보았을까나. 그러면 그 때마다 일렁여 오는 푸른 그리움에 어울려 흐느껴 물살짓는 어깨가 얼마쯤 하였을까나. 진실로,
우리가 받들 산신령은 그 어디 있을까마는 산과 언덕들의 만 리 같은 물살을 굽어보는, 춘향은 바람에 어울린 수정빛 임자가 아니었을까나.
-<춘향이 마음 초>(1962)-
박재삼 시인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춘향이 마음>(1962)-
박재삼 시인 / 자연 - 춘향이 마음 초(抄)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 <춘향이 마음>(1962) -
박재삼 시인 / 추억에서
진주(晋州)장터 생어물(魚物)전에는 바다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끝에 남은 고기 몇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 <춘향이 마음>(1962) -
박재삼 시인 / 흥부 부부상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니.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 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춘향의 마음>(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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